미국,이인모씨 訪美 허용에 담긴 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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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9일 미국에 도착한 이인모(李仁模)씨는 미국이 신병치료를 목적으로 북한 민간인에게 비자를 발급해준 첫 케이스다.
북.미 관계 개선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최근들어 미국의 북한인에대한 비자발급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추세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외교관이나 정부관리,학술회의에 참석하는 학자등 특정 범주를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李씨를 포함한 일행 5명에게 비자를 내주고 李씨의 미국병원 입원.치료를 허락한 미국의 조치는 단순히 인도적 차원의 조치로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다.최근의 북.미 관계기류를 반영하는 정치적 합의가 내포돼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특히 미국비자를 받은 인물이 다름아닌 李씨라는게 「다른 해석」을 낳을 소지를 충분히 지닌다.
李씨는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 등을 하다 34년간 옥살이를 하고도 끝내 전향을 거부한 사람이다.그리고 북한에 송환돼서는 김일성(金日成)의 환대를 받았고 「남조선 괴뢰와 끝까지 투쟁한 영웅」으로 추앙받았다.남한으로선 껄끄럽고 부담스런 그런 李씨를,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추가완화등 북.미관계 개선이 핫이슈가 돼있는 시점에서 미국정부가 처음으로 비자를 발급했다는 것은 예사로울 수 없는 「사건」임은 물론이다.
李씨의 방미에 앞서 미국정부는 우리측에 미리 李씨 일행에 대한 비자발급 계획을 알려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그러나 내용은「인도적 차원에서 李씨에 대한 비자발급을 허용할 테니 그렇게 알라」는 식의 사실상 일방적 통보였던 것으로 전 해진다.
그럼에도 외무부는 『사전에 우리측의 의견을 물어왔다』면서 『인도적 견지에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며 시치미를 떼고 있다.우리와 사전협의 절차를 거쳤다는 주장이다.『우리가 북.미간 연락사무소 개설에 동의했고,양국 인사의 상호방문이 줄을 잇고 있는 마당에 인도적 목적의 비자발급까지 우리가 문제삼을 필요가있겠느냐』는 반문도 하고 있다.
그러나 미전향 장기수였던 李씨의 방미가 갖는 상징성과 최근의경색된 남북관계를 고려할 때 정부가 「인도적 견지에서」 선뜻 동의했다는 점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북한이 李씨의 방미치료를 정치적으로 최대한 이용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북한의 인권개선과 대미(對美) 관계진전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좋은 선전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이렇게 볼 때 李씨에대한 비자발급은 우리정부의 의사와 무관한 미 정부의 일방적 조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반도평화 4자회담,대북 식량지원등 남북관계 현안을 둘러싸고한.미간에 묘한 인식차가 노출되고 있는 미묘한 시점에서 단행된미 정부의 이번 조치는 북.미 관계의 본격진전을 예고하는 신호탄인 동시에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미 정부의 불만표시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배명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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