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일기>SBS "만강" 순금이네役 한혜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6면

연기생활 20년.결코 짧지 않은 세월동안 안해본 역없이 다해봤다고 자부한다.남의 인생을 골고루 경험해 보는 것이 연기자의매력이자 행복이라면 나는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아온 셈이다.
물론 나를 필요로한 대부분의 역할이 도시적이고 이지적이며 정리정돈이 잘된 「완벽주의자」 혹은 「깍쟁이」였다.그래선지 사람들은 나보고 차갑다고들 한다.이런 이유로 『만강』의 순금이네는 내 연기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역할이다.능청스런 충청도사투리와 시골여인네의 질박한 정서 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순금이네를 통해 나는 어릴적 우리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양반집 아들 만강을 데려다 키우면서 순금이네는 때론 으르고 때론 닦달하면서 억세게 다룬다.잘못이 있으면 사정없이 매를 들기도 한다.그러다가 불쌍해 눈물을 훔치며 가엾은 인생을 걱정한다.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어른들의 허물을 뒤집어 쓴채 가혹한 인생에 내몰린 만강의 처지가 그저 딱하고 안쓰러워 사랑의 매를 드는 것이다.우리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도 바로 이 대목에서다.자식들 잘되게 하려고 매를 들었던 어머니 의 그 깊은사랑을 이제야 순금이네를 통해 절절히 배우고 있다.
사실 이런 순금이네를 「연기」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앞서 말했듯이 고정화된 나의 외적 이미지와 순금이네를 연결시키는 것이 우선 쉽지 않았다.
충청도 출신 후배연기자에게 자문하면서 열심히 사투리를 외운 끝에 7회가 돼서야 그 맛을 알게 됐다.
꾸밈이 없으니 편한 점도 많다.시골 아낙네의 자연스러움과 순수한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주면 되니 특별히 분장이나 의상에 신경쓸 필요가 없어 좋다.
편한 마음으로 어머니의 사랑과 인생을 배우는 순금이네는 분명내 연기경력에 뜻깊은 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