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화약고’발칸 지역, 예술도시 탈바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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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고 있는 미술관에서 기획 중인 국제교류전 일로 발칸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다. 20여 시간에 이르는 긴 비행시간을‘죽여 줄’ 책을 고르느라 고심했으나, 결국 집어든 책은 『발칸 분쟁사』(김성진 지음, 우리문학사, 290쪽, 8000원)와 『전쟁이 끝난 후』(타리크 알리 외 지음, 이후, 234쪽, 9000원)였다. ‘비행기 정서’에는 맞지 않는 책이지만 1990년대 세계의 화약고로 악명 높았던 옛 유고연방을 향하는 방문객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발칸분쟁사』는 복잡하게 뒤엉킨 발칸지역의 역사를 가닥으로 풀어내며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과정을 비교적 알기 쉽게 정리해 놓은 책이다. 저자의 정치적 입장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었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독해 불가능한 그 끔찍한 분쟁 지역으로 들어가기가 싫어지는 맘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열흘간의 짧은 체류 이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떠나면서 드는 생각은 전혀 달랐다. 발칸지역은 요 몇 년 사이 서유럽의 현대미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아왔다. 그 시각이 오리엔탈리즘의 또 다른 변종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지만, 정치·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현대미술의 다양한 어법들을 제시하면서 동유럽이 새로운 예술적 에너지원으로 떠오르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연일 밤늦게까지 벌어지는 예술인의 토론에서 그 저력을 감지했다면, 그리고 전쟁의 상처와 함께 그 기간을 버텨낸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감지했다면 한갓 외부자로서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

『전쟁이 끝난 후』는 ‘코소보를 둘러싼 나토의 발칸 전쟁이 남긴 것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명목 아래 미국과 서유럽이 감행한 물리적 공격의 참혹한 결과를 노암 촘스키·에드워드 사이드등 내노라하는 지식인들이 날카롭게 비판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베오그라드의 한 예술가에게 밀로세비치와 나토가 같은 전범으로 받아들여졌던 이유가 좀 더 분명해졌다.

백지숙 문예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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