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셋은 S호텔에 투숙한다고 했다.우변호사가 서울에 올 때마다 묵는 호텔이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가 지금 서울에 와 있으면 우연히부딪치게 될지도 모른다.마음에 걸렸으나 지배인이 친구라며 스티븐슨교수는 도쿄를 떠나기 전에 이미 예약을 해놓았다.
공항엔 어김없이 아버지가 마중나와 있었다.이자벨은 구면이지만스티븐슨과 콕 로빈은 초면이다.아버지의 유창한 영어 응대에 둘은 시름에서 놓여난 표정으로 반가워했다.
콕 로빈은 특별히 정중했다.「장수를 쏘려면 먼저 말을 쏘아라」란 속담이 있다.말타고 바람처럼 달리는 장수를 화살로 맞히자면 먼저 말부터 쏘아 쓰러뜨리는 것이 순서라는「공격의 슬기」다. 아리영을 흠모하는 콕 로빈으로서는 우선 아버지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S호텔로 가는 셔틀버스 속에서도그는 아리영과 아버지를 향해 몇번이나 선 채로 절을 했다.
『상냥한 미국 신사로구나.』 『네덜란드계 미국인이에요.어머니는 일본 분이지만 가야(伽倻)계 후손이라는군요.외가댁 성씨도 「가야」씨라나봐요.』 꼼꼼히 소개말을 하는 딸을 아버지는 새삼스런 듯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서방이 장가간다더라.』 『장가요?』 이혼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장가」인가 싶었지만 짐짓 밝은 소리를 냈다.
『잘됐군요.목장 일을 하자면 안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겠지요.누군가요,상대는?』 『애소네 마을 초등교 여교사래.서울서 부임해온지 몇달 됐다던가….』 『서울사람인 모양이군요.』 『글쎄다.
』 『서울 여성이 목장생활에 잘 적응할까요?』 『…여덟살 손위라니까 차분히 해낼테지.』 아리영은 귀를 의심했다.
『여덟살이나? 연상의 여인이군요!』 『요즘은「연상의 여자,연하의 남자」가 유행이라면서?』 아버지가 농담처럼 되묻고 덧붙였다. 『하기야 요즘만의 일은 아니지.유럽에선 전부터 그런 경우가 많았으니까.영국의 정치가 디즈레일리와 옛 서독의 뤼프케 대통령의 아내는 아마 열두살이나 연상이었다지? 셰익스피어의 아내도 여덟살 위였고….』 셰익스피어가 여덟살 연상의 여인 앤과 결혼한 것은 열여덟살 때 일이다.그 반년만에 맏딸이 태어난 것을 보니 「속도위반」을 한 셈이다.
스트랫퍼드 온 에이번.셰익스피어의 고향이 있는 「앤의 집」생각이 났다.
글 이영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