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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석칼럼>정부,은행,대기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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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지 오늘이 35주년이다.박정희(朴正熙) 시대 18년은 성공적인 정치는 아니었지만 성공적인 경제였음에는 틀림이 없다.이 성공에는 세 가지 처방이 기여했다.
첫째는 관료를 군대식으로 재조직한 것이다.군대는 6.25 실전을 기회로 당시로선 가장 현대적인 방법론과 인력을 갖추고 있었다. 둘째는 사회간접자본 건설이다.무(無)에서 유(有)로 첫걸음을 떼는 초보적 규모의 전력.도로.항만.통신 등 시설 건설에 박정희씨는 천재적 집념을 가진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직접담당했다.
셋째는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돈놀이였다.한국은행을 시켜 찍어 낸 돈과 미국.일본 등 외국에서 빌려 온 돈을 간단히망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는 우등생 장사꾼들에게 빌려주는 것이었다.수출산업은 보너스 점수를 줘 우대했다.실은 박정희 경제의성공 비화의 핵심은 이 돈놀이 부분이다.
박정희 경제의 수명에도 올 날은 왔다.1979년은 경제학에서말하는 무한정 노동공급(unlimited supply of labor)단계가 한국에서 현시(顯示)적으로 끝난 해였다.수출에지극한 효자 노릇을 해오던 가발.합판.봉제.신 발 등 단순노동집약 산업이 차례로 곤경에 들어갔다.「YH무역」이라는 가발 공장 스트라이크는 한 여공의 동맥절단 자살을 불렀고,이 자살은 부마(釜馬)사태,박정희씨 암살,노동세력의 등장,좌익활동의 표면화 등 줄을 서서 닥칠 혼란들을 알 린 봉화(烽火)였다.
박정희씨는 현명한 경제계획가였다.노동집약적 산업의 종언을 예견하고 그는 무리를 해서라도 중화학공업을 일으켰다.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마지막 날까지 이들 중화학공업은 잘 가동해 새 효자노릇을 하기는커녕 건설비를 감당 못하고 계속 쓰 러지는 부담만그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5.17로 등장한 전두환(全斗煥)정권은 당시 제3세계 군사독재의 전형 그대로 「사회정의」를 내걸었다.사회정의라는 구호는 물론 본래는 사회주의자들이 가지고 다니던 무기였다.전두환정권은이 훔친 무기로 한 쪽으로는 재벌을 협박하고 다 른 쪽으로는 사회정의의 원래 주인인 노동운동과 좌익세력을 진압했다.
전두환정권 초기인 80년대 초반은 우리 나라 재벌이 자본 기술 집약적 산업에로 심화(深化)및 다각화한 시기이기도 했다.대기업들은 박정희 경제의 말년에 세우자 쓰러진 중화학공업을 정부의 지시에 따라 논바닥에 떨어진 이삭 줍듯 거둬 들였다.그리고는 우등생 경영 재간을 발휘해 채산성있는 수출 기업으로 재구성해냈다.돈은 은행이 대주었다.
전두환정권의 천재성은 경제개발이 아니라 개인 치부에 있었다.
전두환씨가 요새 법정에서 자기가 뇌물 아닌 「헌금」을 받았더니그때야 경제인들이 마음 놓고 사업활동을 하더라는 말은 절묘하다.그는 은행을 시켜 두 가지를 했는데 하나는 회 사를 사고 세우고 운영할 돈을 꿔주는 것이었고,다른 하나는 갑자기 돈줄을 막아 대기업을 쓰러뜨려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일이었다.
대기업을 쓰러뜨림으로써 정부는 자신이 사회정의와 자본주의 원리마저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임을 보여 주려고 했다.그런데 이것은 무엇보다 모든 재산가들을 전전긍긍하도록 만들었다.그에게헌금 아닌 뇌물을 바쳐 그가 받으면 그것으로 면 죄부와 축복을산 것이므로 기업활동을 안심하고 할 수 있었다.전두환씨는 이것을 뇌물수수가 아닌 한국 경제발전을 위해 이룩한 자기의 공로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5.16,5.17 정권을 거쳐 지금 정부도 은행을 인형극 줄처럼 손가락에 끼우고 있으려는데 이것은 시대착오다.이젠 그것으로 대기업을 유희(遊戱)하기엔 줄이 너무 가늘다.지난 대통령선거 다음 어쩐 일인지 우리 나라 은행들은 현대그룹 에 대한 금융을 오랫동안 일체 중단했다.그런데도 현대그룹은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조선.자동차.전자.건설에서 세계적 지위를 한층 굳건하게다졌다.해외 금융기관의 글로벌활동 덕분이었다.
지금 은행의 주식은 모두 민간이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은행장추천위원회」,「산업자본이 금융을 지배케 해서는 안된다」등만고에 없는 아리송한 기구와 논리로 주주의 경영진 선거권을 막아놓고 있다.큰 기업일수록 이젠 은행 돈은 안쓰 는 시대가 됐다.은행을 정부의 손가락에 끼우고 있다가는 망하는 것은 은행돈을 쓰는 기업이 아니다.은행이 망할 차례다.그리고 한푼 두푼 모아 은행에 돈을 맡긴 예금자들이 망한다.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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