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칼럼>꽃.과일.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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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재작년 가을은 단풍이 고왔다.50년래 최고라느니 1백년래 최고라느니 그런 말이 돌았다.올 봄은 꽃이 그렇다.
어린이날이기도 했던 지난 일요일 손자아이들의 잔치 구경 나온70대 중반 노인 세분 틈에 끼여 한 시간쯤 그분들의 대화를 들었다.올 봄엔 꽃이 유난히 아름답다는 탄복이 중심이었는데,오랜만에 이런 탄복을 귀로 듣는 맛은 더 좋았다.
꽃송이가 유난히 클 뿐 아니라 숫자도 많이 달렸다,빛깔이 특이하게 맑고 윤기가 있다,향기가 여느해보다 진하고 달콤하다,그밖에도 여러가지 칭찬이 이어졌다.
한 노인의 관찰력 덕택에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확인하게 됐다.개나리.진 달래.목련.벚꽃.라일락,이 모든 봄꽃들이 올해는 거의 동시에 피었다는 사실이다.다른 학교 다니는 어린이들이동시에 출연한 매스게임 같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열고 아직 남아 있는 꽃을 찾아 보았다.나무꽃으로는 라일락.사과꽃.배꽃.철쭉 등이 보였다.풀꽃은 나무꽃보다 대체로 더 오래 피어 견디고 있었다.나무꽃 쪽은 과육(果肉)이 두꺼운 큰 열매를 기르는데 드는 시간을 벌 려고 서둘러 자신의 꽃 시절을 단축하는지도 모른다.풀꽃 가운데는 과일 없이달랑 씨만 맺는 것이 많다.그러나 딸기.호박.가지.오이 따위 풀꽃은 과육이 풍만한 열매를 맺는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꽃과 잎 사이로 새들이 소리 지 르며 날아 다니다가 짝짓기하는 모습도 보였다.신(神)이 제작 운영하고 있는 가상공간을 우리는 자연 또는 현실이라고 부른다.
그 이튿날인 월요일 석간은 2020년이라는 미래에 주렁 주렁열 것이라는 희망의 과일을 미리 따서 한 트럭, 아니 한 화차(貨車), 아니 한 대형컨테이너선(船) 가득히 담아 싣고 청와대에 배달했다는 기사로 첫면을 채우고 있었다.한 국개발원(KDI)의 「21세기 한국경제 전략 보고」가 그것이다.이 과일은 KDI의 전문가들이 제작한 가상공간이다.사람이 만드는 가상공간을 우리는 보통 인공(人工)이라고 부르지만 때로는 의지(意志)또는 욕심(慾心)이라고 부르기도 한 다.
이 「보고(報告)」에서 이건 지나치다 싶은 점 두가지만 들자.첫째 2020년의 1인당 국내총생산을 억지로 달러화(貨) 명목가치로 셈해 8만6백달러라고 대서특필한 점이다(화요일 조간부터는 1995년 기준 불변가치로 셈하여 3만2천달 러로 발표했다).무슨 재주로 달러화 물가상승률을 예측해 내 지금 가치로 3만2천달러가 2020년 가치로는 8만6백달러가 된다는 것까지계산했을까.숫자 과장(誇張)에 집착한 결과인 듯한 너무 멀리 간 이런 돌출이 청와대의 시선이나 이 해(理解)를 이끌어내는데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라면 걱정스럽다.
둘째로는 유치한 석차 매기기 악습이다.석차 매기기는 자기보다떨어지는 사람에게는 우쭐대고,앞서는 사람에게는 굽실거리거나 시기심을 품는 짓과 직결되는 일이다.게다가 앞으로 25년 뒤의 세계 각국 경제성적을 일일이 「예측」하지 않고는 우리 경제가 세계7위라고 석차를 매기는 일은 불가능하다.이런 예측 작업은 가장 잘해도 낭비(浪費).도로(徒勞).허영(虛榮)일 뿐이다.그리고 십중팔구는 틀린 결과를 가져온다.
얼마나 「나라」가 좀스럽길래 제성적만 목표를 두고 공부하면 될 것을,남의 25년후 성적까지 계산해 내것과 비교해 보아야 직성이 풀리고 그러느라 밤을 새울까.2020년 각국 경제 석차표 11등 안에 인도는 물론 러시아가 보이지 않는 다.영국.브라질.캐나다.스페인은 한국에 추월당한다.공연히 국제사회에서 불쾌감.적대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없을까.
좋은 과일에 조미료를 뿌려 내놓아 망친듯한 이런 실없는 결점을 제외하면 이번 「21세기 한국 경제 전략 보고」는 매우 훌륭하다.통일이 빠졌고 재원조달 방도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 썩 의미있는 결점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전국 반 나절 생활권,하수처리 95%,평균수명 77세,주택보급률 1백%,이 모든 것은 절실하고 적절한 목표다.정부기능의 최대한 민간이양,정부 생산성 강조,사회간접자본(SOC) 확충,정보통신 전략산업 육성….장기계획다운 잘 여문 전략의 씨들이 수북하게 들어있다.
꽃이 지면 그 자리에 열매가 맺고, 열매의 과육 속에는 씨가들어 있다.봄은 꽃을 보는 계절이지만 또 씨 뿌리는 계절이기도하다.사람이 제작한 「의지」라는 가상공간을 신이 자신의 가상공간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그런때 우리는 인간의 의지가 「실현(實現)」됐다고 말한다.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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