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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10대>9.열쇠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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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李모(38.여.회사원)씨는 최근 결혼이전부터 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여러차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도 고집해오던 직장을 버리기로 한 것은 서울S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는 아들 金모(12)군 때문이다.
어느때부턴가 金군이 습관처럼 욕설을 내뱉고 물건을 집어던지는등 성격이 거칠어진 것을 李씨는 느꼈다.처음엔 『저 나이엔 으레 그러려니』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가벼운 꾸중 정도로 넘겼다.그러나 갈수록 심해졌다.학원에 보내자 잘 나가지 않는 것은 물론 『공부에는 건성이고,나무라자 「학원비를 돌려달라」며뛰쳐나가기도 했다』는 학원 선생님의 말을 듣고선 큰일났다 싶었다. 金군은 이른바 「나홀로 열쇠족」 아이다.金군처럼 맞벌이하는 부모가 직장에 매달려 있는 사이 혼자 집을 지키며 멋대로 버릇을 키우며 자라는 아이들이 요즘 부쩍 늘어났다.
金군네 반에서만도 43명중 집열쇠를 갖고 다니는 학생이 3분의1 가량인 15명이다.
70,80년대만 해도 주로 경제적 이유에서 부부가 맞벌이에 나섰다.요즘 주부들은 자아실현이란 보다 자기중심적인 이유에서 직장을 갖는 경우가 많다.같은 맥락에서 전업 주부들도 자기개발등 여가.사회활동에 시간을 많이 쓴다.그 당연한 결과로 성장기의 10대들이 어른들의 보호와 관심에서 벗어나 외로운 존재로 남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이를 핵가족 단계를 지난 분열가족의 양상으로 진단하기도 한다.이런 성장환경이 컴퓨터.전자오락.TV.만화같은 새로운 문명현상과 결합하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의식.정서.행동방식을 공유하는 신10대가 탄생하는 것이다.
나홀로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자립심을 키우고 혼자 일을 헤쳐나가는데 익숙해지는 등 장점을 가질 수도 물론 있다.
서울M여중 朴모(15)양은 『부모님이 피곤하시니까 내가 자주집안일을 하게 되고 자꾸 하니까 재미도 붙고….아무튼 남이 내게 뭘 시키기 전에 일을 끝내려는 습성이 몸에 뱄다』고 말한다. 올해 「좋은 아버지」상을 탄 성민섭(成旼燮)변호사의 아들 완지(12)군은 『부모님께서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 우리도 저렇게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며 『부모님의 지도를 받기도 하지만 가능한한 혼자 하도록 놔두시니까 책임감도 강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짧은 시간이나마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고 아이들의 눈높이에서이해하려 했더니 함께 깨우치기도 하고 길이 보이더군요.휴일이면아들을 데리고 단둘이 여행하며 서로를 느끼는데 힘썼습니다.』 成변호사의 경험담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소수다.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경우가 더 많다. 학교가 끝나도 마땅히 갈곳이 없는 10대들은 집에서 혼자 TV.비디오를 보거나,컴퓨터 오락을 하거나 동네친구들과 어울려 전자오락실을 찾는다.어른들이 모르는 저희들만의 즐거움을 찾아내고 나름의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
『컴퓨터는 언제든지 켜면 만날 수 있잖아요.기계적이지만 곧바로 응대해주니까요.』 서울J고 金모(17)군의 말은 단절의 가정문화를 단적으로 드러낸다.열쇠족은 사이버세대를 키우는 징검다리이기도 한 것이다.
이들 나홀로아이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경우가 많다.
청소년 대화의 광장에서 전화상담을 하는 林은미(31)씨는 『부모가 집을 비워 바깥을 배회하는 10대들의 마음속엔 불안과 분노가 병존한다.부모가 「돈과 명예」때문에 자신을 버렸다고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아이들도 더러 있다』고 말한다 .
『시간은 많은 것 같은데 뭘 해야할지 판단이 안서 머뭇거리게되고 「에라 모르겠다」고 행동하다 보면 꼭 사고가 나요.제 경우 자꾸만 충동적으로 주먹을 휘두르게 됩니다.한번은 나도 모르게 친구를 때린 적이 있어요.아무 일도 아니었는 데 그냥 「욱」하는 생각에서….나도 내가 어떻게 된건지 알 수 없어요.』(중2년 C모군) 예전엔 「저를 공부시키려고 저렇게 고생하시는구나」라는 인식이 청소년 저변에 깔려있었다.그러나 요즘은 이같은생각을 기대할 수 없다.무엇이든 자신들의 행동에 반응해주기를 바라는게 보통이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의 정신과 의사 와다 히데키(和田秀樹)는 『구세대는 감정을 삭이는 조울증 형태지만 요즘의 신세대는변덕이 심한 분열증형』이라며 『물질적 풍요와 애정결핍이 그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분열증형의 특징은 자신에게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주면 금방 상대를 이상화시켜 버린다.그때 그때 인기있는 연예인에게만 몰려 히트를 거대화하는 현상도 이같은 증상의 분출에서 비롯된 것으로볼 수 있다.
덕성여대 아동가족학과 李옥교수는 『학업성취 위주의 지도나 학원과외와 같은 잘못된 방과후 시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것을막기 위해서는 방과후 프로그램을 정부차원에서 개발하고 보급해야한다』고 지적했다.
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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