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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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콕 로빈이었다.아네모네를 한다발 안고 있었다.
빨강.보라.하양… 화려하고 야들야들한 봄꽃 무더기 속에 잿빛을 머금은 그의 푸른 눈이 빛나고 있었다.
서양사람들은 왜 저렇게 보석같은 빛깔의 눈을 가졌을까.새삼 신기했다.그래서 우리의 옛 조상들은 그들을 「색목인(色目人)」이라 불렀는가.
멍청하게 서있는 아리영의 손목을 잡고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고려가요 『쌍화점』의 회회(回回)아비 생각이 났다.회회아비는 색목인 남자를 가리킨 낱말이다.
『쌍화점에 쌍화만두 사러 가니 회회아비 내 손목을 쥐더라….
』 이렇게 시작하는 『쌍화점』은 원문으로 읊어야 훨씬 운치가 있다. 『상화점에 상화 사라 가고신딘 회회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손모글 주여인」채 아리영은 콕 로빈의 방으로 이끌려 들어갔다.낌새가 이상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벽 한가운데 까만 옷을 입은 일본 옛 무사(武士) 그림이 걸려 있고,그 아래 탁자엔 일본 여인의 사진 액자와 불그무레한 토기 항아리가 놓여 있다.가야(伽倻)토기와 흡사했다.
콕 로빈은 그 항아리에 아네모네 다발을 꽂고 사진에다 입을 맞추었다.
『오늘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신날입니다.어머니는 아네모네를 좋아하셨지요.』 -어머니? 저 여성이 콕 로빈의 어머니란 말인가.사진의 여인은 분명히 일본옷을 입은 동양인이다.눈매가 긴 미인이었다.
『친 어머니신가요?』 『네,제 얼굴이 어머니를 안 닮았습니까?』 『아니요.』 아리영은 고개를 저었다.
『모두들 그래요.저는 아버지를 빼닮았거든요.』 『그럼,어머님께서는 일본분이셨나요?』 아리영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콕 로빈의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것이 왜 「사건」처럼 여겨지는지 알수 없었다.
『네.그러나 아주 오랜 옛날까지 더듬어 올라가면 어머니의 조상은 가야사람입니다.그래서 어머니 친가(親家) 성(姓)은 「가야」씨지요.한자는 일본식으로 「가야(伽倻.がや)」라고 쓰지만 6세기초에 일본으로 건너온 가야사람의 후손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리영은 또한번 충격을 받았다.
6세기초라면 1천4백년 전의 일이다.그 아득한 옛날 가야에서왜땅으로 진출해와 스스로 「가야」라 성을 지어 부르며 여지껏 뿌리를 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콕 로빈이 갑자기 아리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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