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도리 뒤집어 입은 날 마주친 세상 풍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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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15면

열흘 전 일이다. 여느 날처럼 출근길 지하철에서 신문을 펼쳐 들고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다리와 신문 사이로 여자 손 하나가 스윽 올라오는 게 아닌가. 헉! 그 손은 ‘급소’ 근처에 멈추더니 아래위로 끄덕거렸다. 그 손의 주인은 신문 너머에서 낮게 속삭였다. “윗도리 뒤집어 입었어요.”

그 사건은 내가 T셔츠를 뒤집어 입었기에 발생했다. T셔츠가 뒤집힌 줄도 모르고 열심히 신문 보는 나를 발견한 그 아주머니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손짓하고 속삭인 것이다. 그 T셔츠는 내가 3년 전부터 늘 뒤집어 입는 옷이다. 술 취해 귀가한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T셔츠를 갈아입고 쓰러져 잤다.

다음날 아침, 거울 속의 나는 뒤집힌 T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그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다. 1만원도 안 되는 그 T셔츠는 집에서나 입으려고 던져둔 옷이었는데 뒤집어 놓고 보니 목·어깨·몸통·허리의 솔기가 노출되면서 근사한 디테일을 이루는 게 아닌가. 나는 당장 그날 아침부터 그 뒤집힌 T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그런 사건이 열흘 전 그날 처음 일어난 건 아니다. 뒤집힌 T셔츠를 입은 첫날도 강남역 2번 출구에서 전단지를 나눠 주던 아주머니가 내게 슬쩍 귀띔해 주었다. “학생, 옷 뒤집혔어.” 그런데 열흘 전 그날은 좀 심했다. 가끔 있는 일이기에 그럴 때면 “아, 예” 하고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능숙하게 대처한다.

그 웃음에는 ‘일부러 뒤집어 입은 겁니다. 지적은 감사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이 있으니 여기서 그만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의미를 담는다. 그런데 갈아탄 7호선 지하철 안에서도 어떤 아주머니가 내 T셔츠를 보고 한 말씀 하시는 게 아닌가. “아이고, 이 총각 옷 뒤집어 입었네.” 그 목소리는 주위 승객들의 시선을 나한테 모으고도 남을 만큼 컸다.

나는 예의 그 미소로 사태를 진압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옆에 앉은 아주머니까지 합세했다. “그게 아니고, 이게 요즘 유행인가 봐. 유행.” 나는 코가 닿을 듯 신문에 얼굴을 박았다. 그날의 해프닝은 점심 먹으러 간 식당에서 찬모 아주머니가 옷 뒤집혔다고 지적하면서 ‘삼세번’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나는 ‘X세대’라 불렸던 사람답게 남들 시선 신경 쓰지 않고 나 입고 싶은 대로 입었다. 보릿고개의 기억이 아직 생생한 아주머니들은 옷을 뒤집어 입었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출근한 청년이 안쓰러워 고쳐 입으라고 말해 주었다. 그들은 내가 왜 옷을 뒤집어 입었는지 모르고, 나는 그들의 간섭을 원하지 않는다.

이 불일치는 세대 간 충돌일까? 나는 그보다 세대 간 교류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해프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PMP 같은 걸로 동영상 보느라 정신없고 자기한테만 몰두하는 건조한 내 아래 세대보다 남한테 관심 많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내 위 세대가 조금 더 좋다. 우리나라가 아직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도 모르는 나라가 아닌 건 그들 덕분이다. ‘다이내믹 코리아’를 일군 것도 그들이며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휴머니즘을 아직 기억하는 것도 그들이다.

그런데, 큰일 났다. 뒤집어 입으면 딱 좋을 바지를 발견했다. T셔츠로도 모자라 바지까지 뒤집어 입고 다니면 지하철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니, 집 밖으로 나올 수 있기는 할까? 오 마이 갓!


현직 남성 잡지 기자인 송원석씨는 ‘신사, 좀 노는 오빠, 그냥 남자’를 구분 짓게 하는 ‘매너’의 정체를 파악, 효과적인 정보를 소개할 것입니다. 입는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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