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현장에서>또 한 차례의 '황색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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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남도(南道)의 들녘엔 봄빛이 완연하다.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은푸릇푸릇 기지개를 켜고 농부들은 농사준비로 바쁘다.해마다 가을이면 타오르듯 붉은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이 있는 전북 정읍은요즘 총선열기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지난 주말 정읍에선 한차례 대회전(大會戰)이 벌어졌다.5일 김대중(金大中)국민회의 총재가 윤철상(尹鐵相)국민회의 후보 지원유세를 벌인데 이어,7일엔 민주당 지도부와 재야인사들이 대거참가한 김원기(金元基)민주당 공동대표 후보지원연 설회가 열렸다. 金총재는 정읍역 광장에서 가진 연설에서 자신은 金대표에 대해 어떤 원한도 없으며 그와 헤어진 것을 사과한다고 말했다.그러나 「내년 대사」를 위해 정읍시민들이 다시 한번 자신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이틀뒤 같은 장소에서 열린 김원기 후보측 방어전엔 「김원기를 살립시다」라고 쓴 플래카드가 나붙었다.金대표는『金총재를 여전히 존경하며 결코 金총재를 배신하지 않았다』고 말해 정읍시민들의 金총재에 대한 존경을 배려했다.하지만 평소의지론인 전북 홀로서기와 김원기 큰인 물 주장은 굽히지 않았다.
「정읍싸움」은 사실상 두 金씨의 대리전(代理戰)이다.김대중총재는 민주당과 결별할 때 자신을 따르지 않은 4선의원 경력의 김원기대표에 무명(無名)인사나 다름없는 金총재 개인비서 출신 윤철상씨를 맞붙였다.金대표에 대한 「응징」이나 다 름없다.따라서 金총재와 金대표 두사람 모두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이다.패배할 경우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
金총재는 호남유세에서 가는 곳마다 이번이 자신의 「마지막 기회」임을 강조하고 내년을 위해 국민회의 후보에 표를 몰아달라고호소했다.정읍은 金총재의 표밭이다.金대표가 4선의 중진의원이 된 것도 金총재 후광(後光)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데 두사람이 하루아침에 둘로 갈라져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그래서 정읍 유권자들은 지금 딜레마에 빠져있다.김대중을 다시한번 밀어주느냐,아니면 젊은 김원기를 살리느냐다.
이번 총선에 대한 호남인들의 관심은 金총재의 대권(大權)가능성에 집중돼 있다.金총재가 정계복귀를 선언했을 때 호남인들의 반응은 비판적이었다.어떤 사람은 밉다고까지 표현했다.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정계복귀를 「이해」하는 쪽으로 바뀌고,다시한번 밀어줘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미워도 다시한번이다.
대부분 호남 출마자들은 여야 할 것 없이 이번 총선을 내년 대통령선거의 전초전(前哨戰)으로 규정하고 있다.따라서 「DJ 대통령 만들기」가 유세장마다 공통된 화두(話頭)다.한 신한국당후보는 DJ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여당후보 한 명쯤은 당선돼야 경상도의 반(反)DJ분위기를 누그러뜨려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한 무소속 후보는 당선 즉시 국민회의 입당을 공약으로 내세우는가 하면,무당파연합의 한 후보는 『당선되면 선생님의 품안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유권자의 반응은 조금 다르다.분위기가 과거와 크게 다르다는 것이 중평(衆評)이다.13,14대땐 광주에서 유권자들이여당 홍보물은 아예 받지도 않았고,여당후보의 선거벽보는 붙기가무섭게 찢겨나갔으며,여당 운동원들은 어깨띠조차 두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여당후보가 합동연설회에서 잘못된 지역정서를 통박해도 청중은 조용히 듣는다.옳은 주장에 대해선 여.야 후보 가리지 않고 박수를 친다.
이같은 현상을 놓고 해석이 구구하다.유권자의 의식이 성숙했기때문이란 해석이 있는가 하면,국민회의에 대한 비판이란 해석도 있다.선거결과도 지난 14대 때와 같은 야당 싹쓸이나 일부 지역의 90% 가까운 몰표는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다.
호남인들의 김대중지지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김대중죽이기』로 유명한 강준만교수는 또다른 저서 『전라도죽이기』에서 수난(受難)에 있어 김대중과 호남인은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지적했다.호남인들은 아직도 깊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 으며,자신들이 겪은 수난의 상징인 DJ에 거는 한(恨)서린 희망도 여전한것같다.그같은 절절한 희망 앞에서 3金청산 주장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호남벌에선 지금 또 한차례 황색바람이 불고 있다. (논설위원) 鄭宇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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