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경원 칼럼

보수·진보가 공유해야 할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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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정치 시스템의 현주소가 과거에 비해 좌측으로 이동했다. 지난 4.15 총선의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우익 자민련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고 좌익 민노당은 입법부의 10석을 차지하는 제3당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 열린우리당은 한국정치사에 처음 있는 진보적 집권당이 되었고 보수적인 제1 야당 한나라당도 이번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들은 16대에 비해 더 젊고 더 좌측으로 이동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 선진국 정치 형태와 비슷해져

이와 같은 한국정치의 상대적 좌경화 현상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줄 안다. 단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한국정치에 있어서의 좌익진보 세력의 부상은 선진 민주국가들의 정치 패턴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지난 반세기 동안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좌익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정치야말로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동안 우익세력이 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는 한국전쟁이라는 충격적인 경험이 있었지만 1980년대에 민주화가 시작되면서 좌익세력의 부상과 한국정치의 '정상화'는 이미 예견된 현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한국정치의 좌익세력 부상 현상이 서방 민주국가의 정당정치 패턴과 일치한다고 해서 무조건 환영만 할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서방 민주국가들이 좌익과 우익 사이에 치열한 경쟁을 허락하면서도 국가의 기본틀은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경쟁의 밑바닥에 진보와 보수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공통된 기본적 원칙과 가치에 대한 합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처럼 자유로운 좌우 경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은 어떤가. 보수와 진보가 공유하는 기본에 대한 합의는 있는가.

말로는 있다고 한다.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 사유재산의 불가침성 등에 대한 국민적 합의는 명문화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문제에 들어갔을 때 과연 한국의 좌파와 우파가 얼마만큼 공통된 인식을 보여줄는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우리는 아직도 분단국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대북 기본인식 문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야 간에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좌우세력이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지 못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경쟁을 하게 되면 한국은 혼란과 갈등이 심화되고 궁극적으로 체제 붕괴까지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의 대북한 인식의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우리들의 기본적인 철학과 가치관의 문제로 귀착된다.

여기에서 적어도 대한민국의 기본적인 가치관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북한의 통치세력을 북한의 일반주민들과 동일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북한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긍정할 수도 없다.

물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북한에 존재하는 세력과 상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수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우리는 북한 통치세력의 부정적 본질과 평화를 위한 대북협상의 현실적 요청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 분단상황 관련 진지한 대화를

앞으로 한국정치에 있어서도 안정된 양당제도, 즉 보수와 진보, 우익과 좌익 사이의 자유로운 경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진지한 대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좌우 간에 공통된 인식이 있어야 한다. 북한 문제에 대한 대화는 없이 서로 상대방의 약점만을 들추는 경쟁을 계속한다면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상대방의 저의에 대해 깊이 불신하는 상태를 면치 못할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을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국민을 착취하고 탄압하는 자들로 보고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을 나라의 정체성(identity)을 파괴하려고 음모하고 있는 위험한 세력으로 보고 있는 형편이다.

너무 늦기 전에 한국의 진보와 보수 사이에 분단상황에 대한 진지한 대화가 있어야겠다.

김경원 고려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