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6> 세상 일이 궁금하면 회현당에 가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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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 말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회현당을 찾은 미식가들. 김명호 제공

중국 근현대의 정치사나 문화사에 등장하는 유명 인물 거의가 미식가였다. 음식의 맛과 향기와 모양새에 예민하고 까다로웠다. 요리 이름의 적절함 여부를 놓고 논쟁을 하는 경우는 허다했고 심하면 의절까지 했다. 이들에게는 눈앞에 닥친 정치·외교 현안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먹는 일이었다. 이들의 일기나 문장 회고록 등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 회현당(會賢堂)이다. 베이하이(北海)공원과 이어진 스차하이(什刹海)의 가장 북쪽에 있는 산둥(山東)요리 집이었다.

회현당의 주인은 주방장이었다. 단골들도 주인의 성이 왕(王)씨라는 것을 소문으로 알았을 뿐 얼굴은 몰랐다. 유명 음식점일수록 주방장과 요리사들을 노출시키지 않는 게 상례였다. 왕은 옌타이(煙臺) 출신으로 산둥성 동파(東派)요리의 대가였다. 우연한 기회에 청(淸) 말 군기대신 장즈둥(張之洞)의 눈에 들었다. 집안에 많은 요리사가 있었지만 장은 그가 만든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 왕도 장이 먹을 것만 만들었다. 가족은 다른 요리사들이 만든 음식을 먹었다. 장이 가는 곳 어디든 왕이 있었다. 1909년 장즈둥이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은 가족 모르게 요리사 왕씨에게 유산을 남겼다. 왕은 장즈둥의 출상일에 장의 영전에 마지막 요리를 만들어 올리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망소루(望蘇樓)라는 남방요리 전문점이 있었다. 원래는 예부시랑 빈루(斌儒)의 사저였다. 부호와 미식가들의 구미에 맞지 않아 문 앞이 항상 썰렁했다. 팔려고 내놓은 것을 왕씨가 인수했다. 중국식 2층 건물이었다. 장즈둥이 준 유산으로 주변에 있는 집들을 사들여 식당 면적을 넓혔다. ㄷ자 모양의 2층 건물 3개 동이 연이어 들어섰다. 동마다 가운데에 무대를 설치했고 회랑은 호수를 향하게 했다. 회현당반장(會賢堂飯庄)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안쪽에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에서 따온 ‘군현필지(群賢必至)’ ‘소장함집(少長咸集)’ 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장즈둥을 따라다니며 보고 들은 게 많았기 때문이다.

장즈둥의 요리사가 개업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장안의 미식가들이 몰려들었다. 베이징 식당 가운데 최초로 냉장고를 구비했고 수족관을 만들어 활어를 요리에 사용했다. 그러나 명성에 비해 맛은 평범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현당이 서태후 말년에서 1930년대 말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유는 주변의 풍광과 단골손님들 때문이었다. 우선 위치가 명·청(明·淸) 양대의 저명한 풍경구(風景區)인 스차하이였다. 여름이면 주변에 버드나무가 우거지고 연꽃시장이 열려 각지의 유람객들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게다가 주변에 왕공(王公) 귀족들의 저택이 즐비했다. 서태후에게 정권을 안겨준 공친왕의 왕부가 뒤쪽에 있었고 작은 다리 하나만 건너면 푸이(溥儀)의 생부 순친왕 다이펑(載豊)의 왕부가 있었다.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동인당(同仁堂) 설립자 웨(樂)씨 집안의 대저택과 정원도 멀지 않았다. 주인 잃은 장즈둥의 집도 호수 건너편에 있었다.

청대의 친왕(親王)과 고관대작, 유명 문인, 예술가, 경극 배우 등이 주 고객이었다. 신해혁명 직전 목소리 크기로 유명한 순친왕은 중요한 군사회의를 이곳에서 여러 차례 여는 바람에 군사 기밀이 많이 새어 나갔고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푸이는 사람을 파견해 새로운 실력자인 군벌들을 회유하기 위한 연회를 회현당에서 자주 열었다.
량치차오(梁啓超) 같은 문화계의 저명 인물과 경극 배우 메이란팡(梅蘭芳)을 비롯해 루쉰(魯迅)·후스(胡適) 등 신문화운동 시기의 진보적인 인사들이 회현당에 모여 진로를 모색하곤 했다. ‘세상 일이 궁금하면 회현당에 가라’는 말이 생겨났다.

회현당은 30년대 말 문을 닫을 때까지 1년에 딱 하루, 장즈둥의 기일에는 영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던 요리는 상품으로 내놓지 않았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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