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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수 마케팅’에 화난 반기문 총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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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화났다. 자신의 이름을 이용한 한국 내 지나친 상술 때문이다.

유엔의 한 고위 관계자는 24일 기자회견을 자청, 반 총장 관련 서적과 행사에 대한 불만과 우려를 전했다. 그는 먼저 “반 총장의 사전 양해 없이 그의 이름을 내세운 책이 10여 권이나 나왔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 중 직접 인터뷰를 했거나 승낙을 받고 쓴 건 한 권도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니 대다수가 제대로일 리 없다. 많은 부분이 엉터리고 때론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지나친 미화도 숱하다고 한다. 가족들의 항의로 고치긴 했지만 반 총장 어머니가 미군 비료공장 잡부로 일하며 어렵게 아들을 키웠다는,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이 책들 중 상당수는 저자들이 반 총장으로부터 직접 받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같이 꾸며져 있다고 유엔 관계자는 전했다. 이 때문에 “이런 책들을 읽는 학생들 중 상당수가 총장이 직접 쓴 걸로 오해하기 쉬울 것”이라고 유엔 측은 우려했다.

심지어 반 총장이 책 발간에 깊이 관여한 것 같은 인상을 주기 위해 그의 사인과 사진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런 터라 반 총장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낸 적도 있었다.

책뿐 아니다. 그의 이름을 내세운 행사들도 반 총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국내 한 대형 서점이 주최한 ‘반기문 장학생 선발 독후감 대회’가 전형적인 사례로 꼽혔다. 이 행사 역시 반 총장 측과의 교감 없이 마음대로 그의 이름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 행사는 반 총장 관련 서적을 읽은 뒤 독후감을 내면 이 중 장학생을 선발하게 돼 있다.

유엔 관계자는 “일단 주최 측에 이름 사용을 중단해 줄 것을 구두로 요청했다”며 “그래도 안 되면 공식 문서를 보낼 방침”이라고 못 박았다.

반 총장은 어디서 어떤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그 자체가 유엔을 대표하는 공적인 것이 된다. 이런 터라 특정 단체·행사 등에서 ‘반기문’이란 이름을 사용하려 해도 유엔의 내부 절차를 거쳐야 한다. 물론 유엔의 수장을 배출했다는 감격에 곳곳에서 반 총장에 대한 책을 내고 그를 기리는 행사를 열려는 건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최소한의 금도는 있는 법이다.

남정호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