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찍을지 정하고 투표장 간 최초 선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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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총선이 나라 모양을 갖추기 위한 선거였다면 두 번째 총선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반석 위해 놓을 인물을 가리기 위한 선거였죠. 5·10 선거는 좌·우 싸움이 한창일 때라서 국민들도 혼돈 상태에서 투표장에 나가는 데 급급했어요. 제2대 총선은 유권자들이 누구를 찍을지 분명히 정하고 나선 첫 번째 선거였죠.”

송방용(95·사진) 전 헌정회장이 내린 1950년 5월 30일 제2대 의원 선거에 대한 평가다. 제헌의원의 임기 2년이 끝난 뒤 치러진 이 선거에 그는 전북 김제에서 무소속 출마해 당선됐다. 5·10 총선에 불참했던 중도파도 선거에 뛰어들었던 그해 선거에서는 무소속 바람이 거셌다. 최초의 선거 바람인 셈이다. 210명의 당선자 중 126명(60%)이 무소속이었다. 이승만이 조직한 대한국민당과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국민당(민국당)은 각각 24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무소속 바람으로 현역 의원이 크게 물갈이돼 179명(85.2%)이 초선이었다.

송 전 회장도 무소속 바람의 주역 중 하나였다. 연희전문 졸업 후 농촌계몽운동으로 명성을 쌓았던 그는 제헌의원인 민국당의 홍희종·조한백, 전 전북지사 장현식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쳤다.

이미 기득권을 가진 이들과의 경쟁은 쉽지 않았다. 50년 2~3월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장하는 민국당 과 갈라선 이승만은 검찰과 경찰을 앞세워 선거 한복판에 개입했다.

“선거 이틀 전 검찰청에서 연락이 와 ‘김제 경찰서에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공산당이니 구속해야 한다는 내용이라나. 다행히 전북 검찰 차장이 영장을 기각시켰지만 다음날 같은 혐의로 선거 사무장을 포함한 운동원 182명이 구금돼 버리고 오후부터는 내가 구속됐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어요. 건재함을 보이기 위해 12시간 동안 자전거로 지역구를 누볐지요”

선거 운동 기간 중 국가보안법을 앞세운 검·경이 조직 사건을 쏟아내는 가운데 총 500여 명의 입후보자와 선거운동원이 체포됐다. 이승만 자신도 5월 24일부터 민정시찰 명분으로 대전·대구·부산·광주 등 전국 8개 도시를 누비며 “공산당은 이번 총선을 계기로 국회에 침투하고 정부를 반대하기에 물심양면 노력하고 있다”고 공안정국 조성에 나섰다.

결국 이승만은 역풍을 맞았다. 성공회대 정해구 교수는 “6·25 전쟁을 경험하기 이전 국민들에게 ‘반공’은 내면화되지 않은 상태였다”며 “이승만 정권의 무리한 공안정국 조성은 유권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고 설명했다.

5·30 선거의 표심은 20여 일 만에 터진 6·25 전쟁으로 정치의 장에서 펼쳐질 기회를 잃었다. 6월 25일은 송 전 회장이 국회에서 입을 양복을 찾으러 명동에 간 날이었다. 그는 그날을 선명히 기억했다. “오전 11시쯤 갑자기 검은 지프가 나타나서는 ‘공산군이 남침했으니 휴가 장병은 원대 복귀하라’는 안내방송을 했어요. 거리가 삽시간에 얼어붙더군요.” 그날 이후 정국 주도권은 다시 이승만에게 넘어갔다.

◇특별취재팀=배영대·원낙연·임장혁 기자

※도움말 주신분(가나다순)=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송성택(102세) 옹, 유영익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석좌교수, 이철승 헌정회장,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 황수익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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