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장의 하루-업무는 뒷전 잡무로 파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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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조찬회→상임이사회→지점 방문→오찬 간담회→업무보고→기업인 면담→결재→리셉션 두 곳 참석….」 모 시중은행 B행장의 하루일정표다.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의 일정이 거의 비슷하게 빠듯하다.은행원이라면 한번쯤은 꿈꿔 보지만, 현실 에서는 하늘의별인 「행장」자리.이 자리가 더 이상 목에 「힘」이나 주면서 1억원에 가까운 연봉에다 판공비나 쓰는,편안한 자리가 아닌 쪽으로 바뀌고 있다.
물론 전에 비해 인사권 등에서 재량권이 강해지는 등 나아진 면도 있다.하지만 금융 여건이 달라지다 보니 이제는 행장이 「본연의 업무」외에도 온갖 잡무(雜務)에다 직접 발로 뛰면서 영업까지 해야 하는 자리로 변한 것이다.
은행에 따라 2백~4백개에 이르는 점포 챙기기에다 각종 간담회.모임에 참가하려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판이다.특히 지방은행장의 경우 온갖 지역행사에 「감초」가 돼야 한다.참석하지 않다간 구설수에 올라 욕먹기 일쑤다.
요즘은 걸핏하면 「행장 문책」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고 나지 않도록」관리 하는 일에도 여간 신경쓰이지 않는다.『꼭 행장이 참석해 달라』 『꼭 행장을 만나야 한다』는 행사나 사람도 줄을 잇는다.
『간혹 정치권 등에서 들어주기 어려운 대출및 인사 청탁을 하면 직접 찾아가 마치 죄지은 듯 양해를 구해야 합니다.이러다 보니 조용히 은행의 장기 발전 계획이나 경영전략을 구상할 수 있는 여유가 없어요.』한 시중은행장의 하소연이다.이렇 게 해도때로는 근거없는 음해성 투서나 모함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하고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심심찮게 생기고 있다.
최근 건강상의 이유로 자진 사임한 홍희흠(洪熹欽)대구은행장과25일 숙환으로 타계한 김동재(金東)보람은행장은 이런 은행장의현주소를 가늠케 하는 예다.
고(故) 金행장의 경우 주치의로부터 『당분간 쉬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받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으나 몸을 빼지 못하다결국 불귀의 객이 됐다.
박의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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