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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엘리트들이 인터넷 문화를 바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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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 22면

“포털의 지식검색 사이트에 의학 상담을 하고, 전문 지식도 없이 답글을 올리는 네티즌들을 보고 걱정됐어요. 제가 진료실에서 환자들에게 하는 설명만 인터넷에 올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일일이 답변하기 어려운 가족이나 친지들의 질문도 해결해줄 수 있고요.”(양광모·33·의사)

전문직 4050세대의 도전

“딸이 ‘아빠의 해박한 지식과 좋은 자료를 혼자만 갖고 있는 게 아깝다’며 권하더군요. 해 보니까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정계준·56·교수)
국내의 블로그 생태계(블로고스피어)가 이제 양적인 팽창 단계를 넘어 진화를 꿈꾸고 있다. 일상이나 사회적 이슈에 대한 1020세대의 가벼운 수다나 대책 없는 불평·불만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최근 전문 지식과 경험을 갖춘 30~40대에 이어 50대까지 본격적으로 가세하고 있다.

신변잡기식의 일기에서 벗어나 정보기술(IT)·문화예술·과학 등 특정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최신 정보와 개인 의견 등을 제시하는 이들 프로 블로거(professional blogger)의 글은 새로운 콘텐트에 목말라하던 네티즌에게서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국내에 ‘블로그’란 용어가 일반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1년 12월 블로그 사용자 모임인 ‘웹로그인코리아(www.wik.ne.kr)’가 발족하면서다. 특히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들이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한 2004년부터 폭발적으로 블로그 이용자가 늘었다. 지난해를 정점으로 올해는 다소 정체 상태다.

웹사이트 조사기관 ‘랭키닷컴’에 따르면 포털 및 전문사이트의 블로그 방문자 수가 지난해 매달 평균 15%씩 증가했으나 올해는 다음에 인수된 티스토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방문자 수가 줄었다.

랭키닷컴 측은 “많은 블로거가 초반에는 열심히 업데이트하며 관리에 신경을 쓰지만 갈수록 블로그를 방치한다”며 “순수 창작 콘텐트는 적고 다른 블로거의 글이나 기사 등을 퍼다 담는 경우가 많다 보니 방문자 수가 줄어드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터넷서비스 업체인 ㈜넷다이버가 4월 한 달간 네이버와 다음·이글루스·티스토리·엠파스·조인스의 블로그 3만 개를 분석한 결과 전체 포스트 가운데 직접 작성하지 않고 스크랩한 포스트 수가 25%를 차지했다. 블로거들이 올린 글 4개 중 1개는 어디선가 ‘퍼온’ 글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분위기를 깰 돌파구로 꼽히는 것이 바로 ‘고수’들의 블로그다. 하루 평균 방문자 수가 1만 명이 넘는 블로그가 1000여 개로 추정되며 이 숫자는 계속 늘고 있다. 이 블로그들은 업데이트 주기가 짧고, 글을 올리는 포스팅 횟수가 많다. 무엇보다 내용의 신뢰성이 높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넷다이버의 분석 결과 일반 블로거는 절반 이상이 10대 이하(51%)인 데 비해 파워 블로거의 경우 20대 이상이 4분의 3을 넘는다. 40대 이상의 경우 일반 블로거 중에선 3%에 불과하지만 파워 블로거 가운데서는 11%의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프로 블로거는 이제 오프라인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올 3월에는 NHN(네이버)과 다음이 ‘대한민국 블로거 콘퍼런스’를 공동 주최해 1500여 명의 블로거가 오프라인에서 한자리에 모이기도 했다. 포털사이트도 이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행사 전날 열린 블로그 영화제 ‘좌충우돌! 블로그, 영화와 놀다’에는 영화 전문 블로거들이 대거 참여해 주목을 받았다.

최근 개봉되는 영화 시사회에는 기자들과 함께 전문 블로거들이 초청되는 게 이미 일반화됐다. 마이크로소프트·삼성전자·LG전자 등 IT 업계나 주방기기 전문업체 등도 유명 블로거를 이용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블로그 네트워크 서비스업체인 태터앤미디어의 한영 이사는 “프로 블로거들이 국내외의 최신 기술 동향이나 제품 정보를 기자들보다 빠르게 업데이트하는 경우가 많다”며 “IT 업체 홍보 담당자들은 블로거를 기자와 다름없이 대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유명 블로거에겐 기자보다 먼저 보도자료를 보내거나 신제품 리뷰를 부탁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기업들 사이에선 블로그를 홍보 마케팅에 적극 활용하는 ‘블로그 비즈니스’가 새로운 영업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앞으로는 PR보다 BR(블로거 릴레이션십·Blogger Relationship)이 더 중요해질 것”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블로거 중에 의사·변호사·교수 등 전문직 파워엘리트들은 소수지만 블로고스피어에 새 바람을 일으키는 중심 세력이다. 전문직을 갖고 있다 해도 주로 신변잡기나 취미 생활에 관한 글을 올리던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코리안 헬스로그(healthlog.kr)’와 김안과 병원의 ‘옆집eye(blog.kimeye.co.kr)’ 등은 진료실이나 수술실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는 의사 블로그의 대표적 사례다. 인터넷 저작권 관련 운동인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코리아(creativecommons.or.kr)’를 이끄는 윤종수 판사나 정치·문화·IT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경희사이버대 민경배 교수(www.min.kr)도 유명 블로거다.

60대 초반의 소설가 박범신씨는 네이버 블로그에 소설 ‘촐라체’를 연재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태터앤미디어의 한 이사는 “홍보용 홈페이지 정도로 여기고 블로그를 개설하는 의사나 변호사도 적지 않지만 앞으로는 전문직 블로거들의 활약이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해 네티즌 사이에서 크게 유행한 ‘와이프로거(주부 블로거)’ ‘북로거(서평 블로거)’ ‘트래블로거(여행 블로거)’ 등의 블로그 신조어 사전에 올해는 또 어떤 단어들이 더해질지 관심거리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고 싶다면, 또는 스스로 전문가라고 생각한다면 명함에 블로그 주소를 새겨야 할 날이 곧 올지도 모른다.

블로거의 활동이 커뮤니티로 이어지는 현상도 두드러진다. 조인스 블로그를 예로 들면 블로거들의 온라인 만남이 오프라인 모임으로 그대로 옮겨지고 있다. ‘고샅길(blog.joins.com/rhjeen0112)’님이 운영하는 서울 인사동의 한 주점은 조블러(조인스 블로거)의 오프라인 아지트가 된 지 오래다.

지난해 서울 원목초등학교에서 소방훈련 도중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고 그 참담했던 심경을 담아 1년 넘게 ‘하늘에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는 ‘agi(blog.joins.com/agigwangil)’님의 포스트에는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가 끊이지 않는다. 인간관계의 새로운 장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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