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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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어깨에서 등줄기로 힘이 빠지며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왜 이자리에 앉아 이런 얘기를 해야하는지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회의(懷疑)와 혐오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생맥주의 하얀 거품이 빈 조끼 안에서 힘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동생은 「오나니」했노라고 주장했다.그러니 자기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가시 찔린 손을 지성껏 치료해준 여성을 그 자리에서 덮쳤다는사실 만큼이나 첫번 관계를 하며 오나니했다는 일에 아리영은 큰충격을 받았다.
더군다나 「본의 아니었다」고 사과했다 한다.정말 어처구니없는짓이다.거짓으로나마 「사랑해서 그랬다」면 여자는 심정적으로 구제받는 구석이라도 찾게 되는 것인데….
한마디로 「나쁜 놈」이다.
이런 남자라면 길게 따질 것도 없다.차라리 인공유산시키고 훌훌 손 털고 새 길을 찾게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애소가 상처받을 것을 상상하니 가슴이 메었다.처지는 좀 다르다 해도 아리영이 겪은 일이 애소에게도 그대로 닥쳐오고있지 않은가.그 일처리를 내가 해야 하다니….이것은 무슨 업보인가. 시동생에 의하면 애소는 「버진」이 아니었다고 했다.그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는 않으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애소의처녀성을 가진 자는 누구인가.언제 일인가.
어지러웠다.
『진작 말씀드렸어야 하는데….저 약혼했습니다.』 시동생이 표정을 바꿔 말을 꺼냈다.
마침 커피숍 한켠에서 경음악 소리가 일었다.오후의 라이브 뮤직 시간이었다.
-약혼? 약혼이라 그랬는가? 아리영은 귀를 의심했다.음악소리때문에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했다.
『뭐라고 하셨어요?』 『약혼을 했습니다!』 관현악의 소용돌이속에서 시동생은 목청을 돋웠다.
『약혼? 누구하고요?』 『여기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입니다.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어요.학위를 따는대로 결혼할 생각입니다.』 하코네(箱根)의 감주 다옥(茶屋)에서 마주친 그 여성인가.세련된 맵시가 생각났다.
『연옥씨 아시지요? 형수님께서 맞선을 주선해주신 그 분 말입니다.그 연옥씨의 친구가 되는 사람이에요.…연옥씨하곤 그 후에도 가끔 만났었는데 좋은 친구라면서 소개해 주시더군요.』 정길례 여사의 딸이 연옥이다.
지난 날의 일들이 잠시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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