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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특집] 팔도소주 … 경남 · 경북 · 부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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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무학 ‘화이트’

부산에 ‘C1’이 있다면 경남엔 ‘화이트 소주’가 있다. 김해·양산 등 부산의 베드타운 성격의 도시를 제외하면 경남에서 화이트 소주의 시장 점유율은 90%를 훌쩍 넘긴다(무학 통계). 무학 화이트는 1995년 25도가 전국 소주의 도량형으로 군림할 때 국내 최초로 개발된 23도 저도주다. 현재는 19.9%까지 내려갔다. 지리산 자락의 경남 산청 땅에서 길어올린 물을 쓰고, 가공 단계에 공을 들여 제법 고급스러운 맛을 낸다. 국내에 시판되는 소주 중에서 알칼리성이 가장 높다는 점도 자랑거리. 또 무학은 2006년 11월 국내에서 가장 낮은 도수의 소주인 ‘좋은 데이’를 출시했다. 알코올 도수가 16.9도에 불과한 이른바 ‘신상’이다. 무학에서 전국 수요를 노리고 개발한 브랜드지만 아직은 지명도가 떨어진다. 대신 맛은 상당하다. 맛을 설명하자면, 첫 맛은 유쾌하다. 화이트 화인이나 샴페인처럼 톡 쏘는 느낌이 입 안을 때린다. 한 모금 넘기고 나면 달달한 향이 입 안을 감돈다. 서울에 유통망만 확보한다면 젊은 여성 수요자를 상대로 선전할 만한 품질이다.

아귀 앞에서 체면을 버리다

진로는 서울·경기의 소주고, 금복주는 대구·경북의 소주다. 그러면 부산·경남은? 소주 회사가 다르다. 부산은 대선주조고, 경남은 무학소주다. 모두 일제 때 설립된 소주 회사다. 부산과 경남은 같은 영남 문화권인데, 쉽게 말해 두 지역 모두 롯데 자이언츠를 열렬히 응원하는데 오로지 소주에서만 확연하게 갈라서 있다. 묘한 일이다.

1965년 정부가 양곡 주류제조 금지 조치를 했을 때 경남에만도 70개 가까운 소주 회사가 성업 중이었단다. 영남 지역도 소주에 관한 한 뒤지지 않는 고장이었던 셈이다. 아마도 그건 바다에 둘러싸인 형세 때문이 아닐까. 풍부한 해산물과 어울리는 건 역시 저 독하고 맑은 술 아니었을까. 영남 지방을 떠돌며 들었던 소주 생각이다.

영남에서 소주와 어울리는 음식 하면 뭐니뭐니 해도 마산 아구찜이다. 마산 바닷가의 오동동에 가면 아예 아구찜 골목이 들어서 있다. 서로 원조라 주장하는 간판 십수 개가 어지러이 늘어서 있다. 아구찜은 말 그대로 아귀(아구는 아귀의 경상도 방언이다)란 생선을 콩나물 등과 함께 볶은 음식. 그런데도 찜이라 부른다. 여기엔 물론 사연이 들어 있다.

아귀 역시 바다에서 나는 여느 별미처럼 애초엔 내다버렸던 물고기다. 워낙 흉측하게 생겨 먹은 데다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아무도 이걸 잡아다 먹을 생각을 못했다. 그물에 걸려 올라와도 다시 풀어주거나 거름 따위로 썼다.

한 40년 전쯤의 어느 겨울날. 마산의 한 어부가 이걸 들고 오동동의 혹부리 할머니네 식당에 가서 조리를 부탁했다. 그러나 할머니도 내팽개쳤다. 그로부터 한 달쯤 뒤 겨울 찬바람을 맞고 얼었다 녹았다 하며 바싹 마른 아귀를 혹부리 할머니가 보게 됐다. 아귀에선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걸 가지고 들어가 할머니가 요리를 해봤다. 북어찜처럼 된장·고추장 따위를 넣고 푹 쪘다. 아구찜이 탄생한 순간이다.

이 일화에서 유래한 건 두 가지다. 지금은 콩나물·미나리 등에 고춧가루 등 갖은 양념과 함께 볶아서 만들지만 예전엔 쪄서 내놨다는 사실이 하나고, 다른 하나는 마른 아귀를 쓴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마산에 가면 특유의 건아구찜을 만날 수 있다. 겨울 바닷가에서 한 달 가까이 말린 아귀는 북어찜마냥 씹는 맛을 즐길 수 있다. 흔히 맛볼 수 있는 생아구찜의 부드러움은 없다. 대신 여운이 오래 남는다. 칼칼하고 매운 향이 입 안을 자극할 때 필요한 게 바로 소주다. 얼얼했던 입 안이 싹 가셔지는 기분이다.

영남에서 소주와 함께 먹을 만한 내륙 음식으로는 울산 언양의 불고기를 추천한다. 언양 시외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언양 불고기 전문점 수십 곳이 모여 있다. 쇠고기를 간장·설탕·참기름 등으로 잔뜩 양념해 석쇠 위에서 구운 음식이다. 이때 곁들여야 할 게 향긋한 언양 미나리다. 소주 한잔은 물론이고.

글·사진 <마산>=손민호 기자

<경북> 금복주 ‘참’

경북에는 ‘복영감’(금복주의 트레이드 마크)이 있다. 해맑게 웃고 있는 빵빵한 얼굴로 술통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오른손에는 술잔을, 왼손에는 술병을 쥐고 소주 한 잔을 권하는 듯하다. 정겨운 주신(酒神)의 모습이다. 80년대 진로의 두꺼비와 쌍벽을 이룰 만큼 번성했던 복영감이지만, 지금은 금복주 본사에서나 볼 수 있는 추억 속의 마스코트가 됐다.

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수도권의 삼학과 진로가 전국의 소주시장을 넘보면서 파상 공세를 펼쳤다. 그래도 단단한 지역 기반으로 흔들림 없이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러나 마냥 견딜 순 없는 일. 94년 말 20여 년 동안 굳건히 지켜온 25도와 복영감을 과감히 포기하고 도수를 2도 낮춘 23도의 참소주를 내놓았다. 안팎으로 “소주가 아니다”란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23도 참소주의 선전으로 금복주 시대를 마감하고 참소주 시대를 열었다.

현재는 참소주의 도수가 19.5도까지 내려갔다. 이제 깨끗한 맛에 역점을 둔다.

여름을 기다렸다, 물 만난 물회

요즘 서울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는 막회의 본고장은 경북 바닷가다. 포항·영덕·울진 등지의 싱싱한 해물을 몇 시간 만에 서울로 올릴 수 있는 정기화물이 일반화됐기 때문이다. 막회는 싱싱한 잡어를 채 치듯 마구 잘라 오이·양파·배 등과 함께 초고추장에 버무려 먹는 음식이다. 횟감도 홍치·날치·청어·꽁치 등 철에 따라 바뀌고 서너 가지 생선을 한 접시에 담는다. 옛날 같으면 서울에선 회로 먹지 않던 것도 등장한다. 전문요리사가 만든 것도 아니다. 세련미는 없지만 바다 향이 물씬 풍기는 토속적인 맛이다. 여름에는 물회도 즐겨 먹는다. 막회와 비슷한 내용물에 자작하게 물을 말아 먹는다. 입맛 없는 여름날의 영양식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포항의 죽도시장에서는 인근 해역에서 갓 잡아올린 신선한 활어들을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죽도시장이나 영포회타운에선 쉽게 막회나 물회를 만날 수 있다. 가격에 맞춰 맘에 드는 생선을 고르면 회를 포장해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푸짐한 양이 반갑다. 2만원이면 어른 세 명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정도다. 야채값 명목으로 2000원을 내면 쌈 채소와 쌈장을 받아 가게 안쪽의 홀에 앉아 먹을 수도 있다. 매운탕도 밥값(한 공기 1000원)만 내면 공짜로 끓여주니 따로 식사 걱정을 안 해도 된다. 시장이든 회타운이든 생선의 신선도나 가격대는 비슷한 편. 다만 영포회타운 쪽의 밑반찬이 좀 더 다양하다.

대구로 들어가면 막창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길거리 어디에서든 쉽게 막창집을 만날 수 있다. 경북대 북문과 서부정류장 옆엔 아예 막창골목이 형성돼 있다. 대구 막창의 역사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내의 가장 큰 도축장인 영천 우시장과 대구 성당못 도축장(현재는 중리동으로 이전)에서 팔고 남은 자투리 내장이 대구로 유입됐고, 이를 불에 구워먹은 것이 시초다. 대구에서 말하는 막창은 소의 네 번째 위인 ‘홍창’이란 것이다. 다른 지역의 막창구이와 달리 생막창이 아닌 삶은 막창을 내온다. 연탄불이나 숯불에 다시 익혀 특별 제조한 된장 소스에 쪽파·땅콩·고추 등을 곁들여 먹는다. 음식점마다 각기 다른 장맛 때문에 같은 맛을 느끼기 어렵다. 요즘엔 생막창이나 돼지 내장도 즐겨 먹는다. 막창의 씁쓸한 맛을 달래고 북돋는 덴 역시 톡 쏘는 ‘쐬주’ 한 모금이다.

글·사진 <대구·포항>=백혜선 기자

<부산> 대선 ‘C1’

소주 ‘C1’은 ‘Clean Number 1’의 줄임말이다. 맑고 깨끗한 맛을 강조한 이름. 그러나 ‘씨원’이라고 읽으면 부산에서 촌놈 취급 받는다. ‘C1’은 ‘시원’이라 불러야 한다. 부산의 자도주 회사 대선주조가 1996년 6월 개발한 알코올 도수 23도의 소주로, 부산에서 소주시장 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하는 단 하나의 브랜드다(대선주조 통계). 요즘 워낙 낮은 도수의 소주가 추세인지라 ‘C1’도 20도로 맞췄다. 서울 등지의 19.5도보다 살짝 높지만 막상 맛보니 부드러움에서 뒤지지 않는다. 지난해 출시한 사각형 병의 ‘C1 프리미엄(21도)’은 더 도수가 높은데도 술술 넘어간다. 식당에서 주문하면 C1(3000원)보다 1000원 더 받지만 맛을 따지자면 1000원 차이는 감수할 만하다. 대선주조 측이 살짝 들려준 부드러움의 비법은 다음과 같다. 물과 알코올을 섞을 때 음악을 들려준다. 그러면 그 음향 진동으로 물과 알코올의 분자가 더 잘 섞인다. 이 비법은 이미 국내 특허를 얻었고, 해외 특허도 현재 진행 중이란다.

곰장어, 짚불에 여름을 태워 보낸다

부산에서 소주와 함께 즐길 만한 음식이 뭐가 있을까. 동래의 파전? 해운대의 회?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기장 곰장어를 찾아냈다. 무엇보다 우리네 서글픈 옛이야기가 담긴 먹거리여서다. 그 얘길 들으러 기장 갯마을까지 내려갔다.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 이른바 곰장어촌. 바다를 지척에 두고 곰장어 전문 음식점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여기가 바로 짚불구이 곰장어를 뜯어먹을 수 있는 곳이다. 짚불구이는 말 그대로 짚불로 곰장어를 구워 내는 요리. 아궁이에 불을 지핀 뒤 석쇠 위에 산 곰장어를 올린 다음 짚불에 넣었다 빼기를 세 번 반복하면 요리가 완성된다.

짚불구이 곰장어를 맛있게 먹으려면 요령이 필요하다. 막 아궁이에서 꺼낸 곰장어를 장갑을 낀 손으로 붙들고 양쪽에서 잡아당긴다(짚불구이 곰장어는 뜨거울 때 먹어야 제격이다. 식으면 특유의 비린내를 감내해야 한다). 그러면 검게 그을린 껍질이 벗겨지면서 노릿한 속살이 드러난다. 그걸 한 손에 들고 기름장에 찍어 한 입 베어 문다. 이때 나머지 한 손에 들려 있어야 할 건 맑고 시원한 소주 잔. 한 입 베어 물고 한입 털어넣고, 그렇게 몇 번 되풀이하다 보면 곰장어 한 마리가 껍질만 남긴 채 종적을 감추고, 소주병 역시 제 빈 속을 금세 드러낸다. 간장 게장을 밥도둑이라 이르듯이, 이렇게 먹는 곰장어는 가위 소주 도둑이라 할 만하다.

지금이야 더할 나위 없는 영양식이자 퇴근길 포장마차의 대표 메뉴로 통한다지만 백 년 전만 해도 곰장어는 금기시되던 물고기였다. 이 동네에서 4대째 곰장어 구이집을 한다는 기장곰장어 김영근(65)씨가 들려준 사연은 다음과 같다.

곰장어는 생김새가 뱀 같고, 끈끈한 진액을 뿜어내는 데다 눈이 없어서 양반집에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곰장어를 잡아다 먹는 부류는 굶주린 백성뿐이었다. 그들은 산과 들에서 농사를 짓다 배가 고프면 주위에 널려 있는 볏짚에 불을 피워 곰장어를 구워 먹었다. 서너 마리만 먹으면 하루는 거뜬히 날 수 있었다. 기장 사람들은 곰장어를 구워 보릿고개를 견뎠다.

요즘엔 소금구이·양념구이 등 메뉴도 다양해졌지만(곰장어를 넣고 끓인 매운탕·된장국, 심지어 곰장어 살로 튀긴 곰가스까지 생겨났지만), 짚불 위에서 굽는 곰장어는 일종의 문화체험에 가깝다. 배 곯던 시절을 기억하는 소중한 의례일 수 있어서다. 이달 17일부터 사흘간 기장에서 제1회 짚불구이 체험축제가 열리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기획된 음식 문화행사다. 이번 여름 부산의 자도주(自道酒) C1과 함께 짚불구이 곰장어를 고른 이유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부산=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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