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라의KISSABOOK] 할아버지·할머니는 가장 좋은 내 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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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스는 노인의 두뇌가 젊은 사람의 두뇌보다 현명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추리력과 기억력은 저하되어도 판단력과 이해력 등 연륜에 의해 축적되는 결정적 지능이 젊은 시절보다 활성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노인이 책 속에서 지혜를 전수하는 현자(賢者)의 역할을 감당해 온 이유도 이런 맥락일 터.

하지만 ‘나이보다 젊게’ 라는 광고가 소비자를 현혹하는 21세기. 요즘 아이들은 주름을 경륜의 표상으로 보지 않는다. 동안 신드롬에 밀려난 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제 노인이 등장하는 동화 역시 판에 박힌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야 하는 건 아닐지.

울프 스타르크의 『휘파람 할아버지』(비룡소)는 석양의 노인과 막 생의 봉오리를 맺기 시작한 아이를 대비시켜 일방적으로 삶의 소중한 교훈을 가르쳐주는 기존 동화의 설정에서 한 발 벗어나 있다.

어느 날 우연히 또뽑기 하듯 외할아버지와 외손자의 인연을 맺은 닐스 할아버지와 베라. 세상의 모든 친구가 그렇듯 둘은 그저 만남이 즐겁다. 베라는 할아버지하고 버찌 서리를 하면서 일심동체보다 더 멋진 동심일체(童心一體)를 맛본다.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가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버찌 서리를 최고의 추억으로 꼽듯, 베라도 이날 버찌나무에서 바라본 하늘의 별을 생애 최고의 보석으로 간직하리라.

할아버지가 베라에게 물려주고 떠난 건 대단한 지혜가 아닌 고작 휘파람 부는 방법이었다.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건네준 선물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멋진 연. 한 세대의 꿈이 다음 세대를 통해 이루어지고 윗물이 흐르고 흘러 더욱 정갈한 생명수가 되어 옹달샘을 채우듯, 안타깝게도 두 가지 선물은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온전히 베라의 몫이 된다. 작가는 속 보이는 교훈을 내세우지 않고도 함께 한 유쾌한 시간 속에 삶이 건네주는 사랑과 존경의 전류를 충만하게 방전해 놓은 것이다.

바버라 슈너부시의 『할머니의 꽃무늬 바지』(어린이작가정신)는 아이의 눈높이에서 치매를 담담하게 다루고 있다. “할머니한테 배운 걸 할머니한테 다시 가르쳐줄 수도 있어요.” 곱씹을수록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한 문장이 주제를 대변한다. 알츠하이머병의 고통에 무게중심을 두지 않고 할머니를 대하는 이상적인 가족의 태도에 포커스를 맞춘 작가가 얼마나 슬기로운지. 덕분에 소재의 묵중함에 눌리지 않고 뭉클한 여운을 음미할 수 있다.

대상 독자는 때론 친구 같고 때론 스승 같은 조부모가 그리운 10세 이상의 어린이와 이제는 받을 길 없는 내리사랑에 가슴 알알한 엄마들.

임사라<동화작가> romans82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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