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 만에 되찾은 왕관 … 스페인 ‘축구 엘도라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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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2008은 축구사에 ‘스페인 축구의 황금기가 열린 대회’로 기억될 것이다. ‘무적 함대’는 모처럼 애칭에 걸맞은 경기력을 뽐내며 최후의 승자가 됐다. 스페인이 30일(한국시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유로 2008 결승전에서 ‘전차 군단’ 독일을 1-0으로 꺾고 앙리 들로네컵을 치켜들었다. 지긋지긋한 징크스를 갈아엎고 1964년 자국에서 열린 유럽선수권 이후 44년 만에 무관의 한을 씻었다.

득점왕을 차지한 비야(4골)가 부상으로 결장했지만 스페인의 ‘시스템’은 ‘다운’되지 않았다. 비야가 빠지자 토레스가 훨훨 날았다. 토레스는 전반 33분 놀라운 스피드로 필리프 람을 제치더니, 오른발로 공을 툭 찍어차 달려나오는 골키퍼를 넘겨 버렸다. 스페인의 황금시대는 이렇게 열렸다.

유로 2008 결승에서 독일을 꺾고 44년간 이어오던 ‘무관의 한’을 푼 스페인 선수들이 시상식에서 환호를 터뜨리고 있다.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선수는 주장이자 골키퍼인 이케르 카시야스. [빈 AP=연합뉴스]

루이스 아라고네스 감독은 70번째 생일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역대 우승 감독 가운데 최연장자다. 44년 전 스페인이 우승할 때 그는 26세의 혈기 방장한 스트라이커였다. 하지만 구경꾼 신세였다. 아라고네스는 그 이듬해 대표팀에 발탁됐다. 그는 선수 때 못 이룬 우승의 꿈을 깊은 주름이 파이고 백발이 성성해서야 이뤄냈다.

유로 2008 개막을 앞두고 영국의 축구 전문지 ‘포포투’는 ‘스페인이 우승할 수밖에 없는 25가지 이유’라는 특집 기사를 게재했다. 그 한 가지가 ‘아라고네스 감독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그 전망이 맞았다.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는 말처럼 아라고네스는 이번 대회를 통해 현대 축구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독일은 8강전에서 포르투갈을 힘으로 제압했지만, 스페인은 사통팔달 연결되는 패스와 좀처럼 공을 빼앗기지 않는 유려한 개인기로 독일을 농락했다. 스페인의 패스는 농구 선수들의 슛처럼 정확했다. 전 국가대표 서정원은 “불가능해 보이는 틈을 비집고 활로를 뚫는다. 오른발, 왼발에 맞춰 주는 것은 기본이고, 상대 수비의 위치에 따라 속도까지 조절해서 패스를 한다”며 혀를 내둘렀다. 사비·이니에스타·세나·파브레가스·실바 등 미드필더진이 한결같이 뛰어난 기량을 지니고 있어, 한 명을 전담 마크하는 것도 소용없다.

패스로 경기를 풀어 나가는 스페인은 늘 상대보다 적게 뛰면서도, 이번 대회 출전 팀 가운데 가장 많은 슈팅(경기당 19.5개)을 기록했다.

스페인의 황금기는 예견된 것이었다. 대표팀의 주축으로 성장한 파브레가스·실바·마르체나·카시야스 등은 청소년기에 유럽과 세계 무대에서 정상에 선 경험이 있다. 푸욜·세나 등 30대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스페인 대표팀은 아직 젊고 파릇파릇하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는 더 강해질 수 있다. 아라고네스 감독은 “이제 스페인은 세계 축구의 모델이 될 것이다. 우리는 누구든 이길 수 있고, 앞으로 몇 번은 더 우승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유럽축구연맹(UEFA)은 스페인의 공격형 미드필더 사비 헤르난데스(28·바르셀로나)를 대회 최우수선수로 선정했다.

빈(오스트리아)=이해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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