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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박물관 순례] 16. 남양주 여유당(與猶堂)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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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여유당(與猶堂). 지금은 신혼부부의 야외 촬영장으로 인기가 있는 팔당 호숫가의 외딴 집으로 남아 있지만 다산 당년에는 그윽한 강마을의 저택이었다. [조용철 기자]

▶ 다산이 밧줄과 도르래를 이용해 만든 물건을 들어올리는 데 사용한 거중기.

요즘은 기상이변이 심하여 날씨를 종잡을 수 없다. 그 사정은 자연의 식물도 마찬가지인 듯 봄꽃들이 제 순서를 기다리지 못하고 한꺼번에 피고 한순간에 시든다.

본래 봄의 화신은 산수유와 매화에서 시작돼 개나리.진달래.살구꽃.앵두꽃.벚꽃.복사꽃으로 이어지는 것이 꽃의 서열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봄은 진달래와 함께 익어간다. 진달래는 키가 작은 떨기나무로 화강암 골산에서도 잘 자라고 참나무.소나무 같은 큰키 나무 틈새에서도 가는 햇살을 받으며 곱게 피어난다.

예부터 한민족은 진달래를 사랑해왔다. 옛 사람의 시에 진달래의 별칭인 두견화(杜鵑花)가 많이 나오는 것, 혜원의 풍속화 중에는 머리에 진달래꽃 한 송이를 꽂은 여인이 나오는 것, 서민들의 봄나들이엔 찹쌀가루에 진달래꽃잎을 붙여 기름에 튀기는 화전(花煎)이 뒤따르는 것, 이 모두가 우리네 봄의 서정이 진달래와 함께 했음을 말해준다.

서울 근교에도 진달래의 명소는 너무 많다. 북한산 진달래능선도 장하고 광주 검단산, 이천 도드람산의 진달래는 떼판으로 피어난다. 그런 중 내가 가장 즐기는 진달래는 경기도 광주, 남양주, 양평 일대의 야산에 핀 진달래를 차창 밖으로 바라보며 일없이 달리는 것이다.

팔당호수를 끼고 한강변을 달리는 이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는 곳곳의 너저분한 가든과 모텔이 사람의 심사를 어지럽게 하지만 그래도 야산의 진달래만은 변함없이 봄날의 정취를 전한다. 특히 도마리.관음리.금사리.분원리 등 옛날 도요지가 있던 도공 마을의 뒷산은 유난히 진달래가 붉게 피어 더욱 장관인데 혹시 가마 땔나무로 벌목을 심하게 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진달래를 찾아가는 나의 팔당 호숫가 드라이브는 거의 반드시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馬峴)마을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사시던 여유당(與猶堂)에서 마무리한다. 여유당은 지금은 팔당 호숫가의 외딴 집으로 남아 있지만 다산 당년에는 그윽한 강마을의 저택이었다. 대한의 풍수가들이 국내 최고의 양택 중 하나로 지목하는 이곳을 그 옛날에는 소내(苕川) 또는 두릉(杜陵)이라 했고, 다산의 5대 조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다산은 여기에서 태어나 여기에서 세상을 떠났고, 이 집 뒷산에 묻혔다. 다산은 22세 때 성균관에 입학한 때부터 임금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다산이 환갑을 맞았을 때 스스로 일대기를 기록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말하기를 자신은 정조의 총애를 지나치리 만큼 받아 상품으로 내려주신 책은 이루 적을 수 없고 호랑이가죽과 말도 받았다고 했다.

다산은 정조를 보필하면서 한강을 건너는 선주교(船舟橋)도 설계했고, 화성(華城) 축조에 쓸 거중기도 제작했다. 그러나 항시 노론 측으로부터의 견제와 시기로 정치적 위기를 맞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1800년, 다산 나이 39세 때 정조대왕이 갑자기 서거하자 다산은 자신의 정치생명도 끝났음을 직감하고 이곳 고향집으로 내려와 "겨울 시내를 건너듯 신중하게 하고, 사방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노자'의 말을 이끌어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짓고 칩거했다. 그렇게 조심했던 다산이었건만 그는 결국 유배객이 돼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보내고 나이 57세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7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줄곧 여유당에 머물며 자신의 학문을 완성시켰다.

다산 선생은 생전에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 내용은 경학.실학.역사.지리.문학.과학.음악.미술.기독교 등 안 걸치는 곳이 없는 대학자이고 사상가이고 시인이었다. 다산이 이룩한 업적은 '목민심서'로 대표되는 실학의 완성이라고 칭송되고 있다. 그러나 다산 자신은 '자찬묘지명'에서 "나의 학문은 한마디로 육경사서(六經四書)로 자신을 닦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본말을 갖춘 것"이라고 했으니 그는 경학과 실학을 모두 아울렀다고 할 것이다.

다산의 시를 말할 때는 사회 현실을 직시한 '애절양(哀折陽)' 같은 현실시에 주목하여 역시 그의 실학자적인 면모를 강조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의 시를 보면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서정시가 많아 혹시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다산의 또 다른 인간적 면모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사실 나는 다산 선생의 인간상은 맑고 곧고 모범생 같은 단아한 선비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다산의 일생을 보면 그는 대단히 낭만적이고 자유분방한 기질까지 갖고 있었다.

다산 나이 36세 때인 1797년의 일이다. 어느 여름날 석류꽃이 막 피고 내리던 보슬비가 개자 고향 소내에서 물고기 잡기 좋을 때라는 생각이 들자 조정의 허가도 받지 않고 고향집으로 달려갔다. 다산은 고향 친척사람들과 강에 나가 그물을 쳐 한배 가득 잡고서는 산나물과 함께 고기를 끓여 실컷 먹었다. 그리고 나서 다산은 천진암(天眞庵)으로 가 사흘을 머물면서 향기로운 꽃과 새소리를 들으며 20여 수의 시를 짓고 돌아왔다.(遊天眞庵記)

그런가 하면 다산은 꽃을 좋아하는 여린 서정도 있었다. 다산이 젊어서 서울 명례방(남대문시장 부근)에 살 때는 자기 집에서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시모임을 결성한 적이 있었다. 이들의 모임은 살구꽃 필 때 한차례 모이고, 복숭아꽃 필 때 한차례 모이고, 참외가 익을 때 한차례 모이고, 연꽃 필 때 한차례 모이고, 가을에 국화가 필 때 한차례 모이고, 겨울에 큰 눈이 내리면 한차례 모이고, 섣달에 분매(盆梅)의 꽃이 피면 한차례 모였다.

다산의 이런 모습을 간혹 학생들에게 얘기해주면 모두 의아해 하면서 어떻게 그런 분이 그처럼 강렬한 현실시를 지을 수 있었을까 되묻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치열하게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이 꼭 서정과 낭만을 발하며 살아가는 것과 배치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답한다. 마치 고은 신경림.김지하의 서정시가 현실시와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다산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으나 그 자신은 그런 세상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살았다. 마치 그가 자연을 사랑하고 꽃을 사랑하던 그 자세, 그 마음으로.

다산이 받은 형벌은 끝까지 사면되지 않았다. 그러다 1910년 조선왕조가 멸망하는 바로 그 해 7월에 극적으로 복권되고 문도공(文度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다산을 위한, 세상을 위한 왕조의 마지막 조치였다. 그리하여 여유당 뒷산 자락에 있는 다산의 묘소 앞에는 "문도공 다산 정약용"으로 시작하는 묘비가 우뚝 서 있다.

다산 묘소에 오르면 여유당 ㅁ자집을 발 아래 두고 팔당호수가 아련히 펼쳐진다. 다산 선생이 살던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떠내려갔고 팔당댐이 생기면서 옛 마을은 모습을 잃게 되었다. 그러다 1975년에 복원한 것이 지금의 여유당이다. 그러나 풍광 수려한 이곳은 이미 유원지로 바뀐 지 오래되어 그 난잡하고 어지러움을 보면 여기가 과연 한국 지성사의 성지(聖地)인가 하는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름다운 것은 두릉골 야산에 피어 있는 연분홍 진달래꽃뿐이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장>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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