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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킹하다고? 난 희망을 말하고 있을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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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사진을 찍자고 하자 데미언 허스트는 선반 위에 놓인 작은 도트 페인팅을 집어들고 익살맞은 포즈를 취했다.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서 이 가짜 그림이 돌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얼른 사서 내 서명을 했어요”라며. 뒤에 세워둔 짙은 파란 그림은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영감을 받은 근작이다. [사진=권근영 기자]

현대 미술의 악동(enfant terrible), 죽음 씨(Mr. Death), 악마의 자식(devil child), 컬트 조각가…. 하나같이 고약한 별명들이다. 8601개의 다이아몬드로 뒤덮은 백금 두개골(918억원), 방부제에 통째로 절인 상어, 파리떼 꼬인 소머리 등을 만든 영국 작가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43) 얘기다. 이같은 엽기적인 작품으로 그는 누구나 안고 있는 주제, 죽음을 정면돌파한다. 세계적 미술잡지 『아트리뷰』는 매년말 ‘세계 미술계를 이끄는 100인’을 꼽는데 데미언은 2006년엔 11위, 지난해엔 6위에 올랐다. 경매사 대표, 미술관장 등을 빼면 작가로서는 가장 높은 순위다. 데미언 허스트를 최근 런던 중심가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3층 건물 두 채를 붙여 쓰고 있는 그의 사무실 안내 데스크에는 둥근 캔버스에 물감을 올려두고 LP판처럼 돌려 만든 본인의 스핀 페인팅이, 응접실 문 위엔 한국계 미국 작가 마이클 주의 사슴뿔 작품이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사무실 한쪽 벽에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짙은 남색 회화가 걸려 있고, 그 주변엔 같은 톤의 어두운 해골 그림들이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본인의 근작이다. 책상 위에 놓은 디즈니 만화 캐릭터 아기 코끼리 덤보 모양의 풍선(제프 쿤스의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양 손에 커다란 해골 반지, 허리에 해골 버클을 찬 데미언 허스트는 자신이 입고있던 줄무늬 셔츠와 청바지 만큼이나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오해말라, 내가 말하는 건 희망이다.”

-엽기 , 선정성을 일부러 즐기나.

“인생 자체가 쇼킹한 거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충격 요법으로 승부하려 들거나, 금기를 깨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고 오해하지 말라. 나는 그저 허구와 실재를 뒤섞어 얘기하고 있는 것 뿐이다.”

-일관되게 생의 유한함을 주제로 다뤘다. 늙고 죽는 게 두려운가?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죽는 날이 가까워온다는 얘기다. 솔직히 둘 다 싫다. 그러나 내일 죽을지언정 우리는 오늘을 그대로 살아내야 한다. 예술가로서 나에게 늙고 죽는 것은 대단한(great) 주제다. 덕분에 내가 좀더 진지해지는 것 같다. 이 때문에 내가 예술을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허나 내 작품이 죽음의 공포를 말하는 건 아니다. 나는 오히려 희망을 말하고 있다. 모름지기 예술이란 희망을 말해야 한다.”

-당신에게도 금기가 있나?

“신을 믿지는 않지만, 금기는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작품을 통해 사회적 금기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어느 정도 자제는 한다. 너무 충격적이라 사람들이 전시장에 들어왔다가 놀라서 바로 나가버리면 안되지 않나.”

-많이 자제했다고? 상어, 죽은 소, 해골이?

“그렇다. 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사람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소 대신 사람을 통째로 갈라서 전시할 수 없지 않나. 인체로 할 수 없는 작업을 동물로 하는 셈이다.” 

#“평범한 걸 다른 관점으로 놓아 새롭게 만드는 것, 그게 예술”

-스스로 꼽는 최고작은?

“파리 연작, 그리고 ‘상어’와 ‘신의 사랑을 위하여’다. 특히 상어의 경우 돌이켜 생각해보면 진짜 미친 짓이었다. 처음에는 상어를 그리려다가 진짜 상어를 썼다. 이후 내 작품이 엄청나게 변했다. 상어 이후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고, 이후 작품의 아이디어도 여기서 나왔다. 이 세 가지 작품은 만들어 놓고 ‘이런 게 가능하다니’하고 나 자신도 놀라 뒤로 넘어갔을 정도다. 괴물 프랑켄슈타인을 만든 과학자와도 같은 공포심이랄까.”

파리 연작인 ‘100년’은 유리상자 속에서 배양된 파리가 날아다니다가 결국 그 안에 설치된 전기 파리잡기에 감전돼 죽게 만든 것, ‘1000년’은 소 머리를 유리상자 속에 넣고 파리가 꼬였다가 죽는 과정을 보여줬다. ‘상어’는 4m 상어를 통째로 포름 알데히드가 담긴 수조에 넣은 것으로 원제는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에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이다. 92년 찰스 사치가 5만 파운드에 산 뒤 2005년 미국의 헤지펀드 매니저 스티븐 코언에게 625만파운드(약 127억원)에 되팔아 화제가 됐었다.

-왜 미술을 하나?

“어린시절 누구나 그림을 그리지 않나. 나는 지금도 그걸 계속할 뿐이다. 그게 진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다섯살 쯤이었나, 어머니는 종이를 한 장 북 뜯어주며 그림을 그리라고 하고는 일을 했다. 어머니는 늘 바빴고 나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얼른 그려서 가져가면 그 옆에 새 종이를 대 주고는 마저 그리라고 했었다.”

-예술이 뭐길래?

“세상사를 재정리해서 세상을 이해하게 만드는 거다. 어린 시절 학교 가는 길에 나무가 있었다. 평상시엔 그 나무를 아무 생각없이 그냥 지나쳤는데, 어느날 보니 나무가 쓰러져 있었다. 충격이었다. 내 생각에 예술은 그런 거다. 평범한 것을 다른 관점으로 놓아 새롭게 만드는 것.” 

#“미술품은 눈으로 사라, 귀로 사지 말고.”

그는 프랜시스 베이컨, 제프 쿤스, 앤디 워홀 등 내로라하는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싹쓸이한 컬렉터로도 이름나 있다. 지난해 초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본인의 소장품 60점으로 연 전시에 인파가 몰리기도 했다.

-컬렉터로도 이름 나 있는데.

“미술관에서나 볼 수 있는 걸작들을 내가 집에 두고 본다는 건 굉장한 일이다. 좋은 작품을 옆에 두고 있으면 나도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거라는 바람도 있다. 컬렉션의 기준? 글쎄, 보기에 좋은 걸 사 모을 뿐이다.”

-사람들이 당신 작품을 어마어마한 가격에 사는 건 ‘데미언 허스트’라는 브랜드와 투자 가치 때문이라고들도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과는 피하고 싶다. 굳이 투자 문제를 말하자면, 내 작품을 일찌감치 샀다가 판 사람들은 상당한 차익을 거뒀다. 그러나 그들조차 더 갖고 있었으면 더 이익을 봤을 거라고 후회한다. 투자 목적으로 작품을 사고 파는 건 권하지 않겠다. 갖고 있어라. 눈으로 사는 이와 귀로 사는 이와의 차이는 작품을 되파는지 여부다. 투자로 사는 이들은 또한 대개 좋지 않은 작품을 산다. 미술계에는 뜨지 않는 작가가 더 많다. 때문에 미술 투자는 위험한 투자다. 미술 투자자들에게는 그보다 더 쉽게 돈 벌 방법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올해로 43세, 젊은 나이인데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앞으로 계획은?

“좀더 개인적인 소품을 하고 싶다. 여전히 제프 쿤스보다 최고가 되고 싶고, 최고 잘 그리는 작가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러나 본질은 내 자신과의 싸움이다. 유명해지는 게 아니라.”

런던= 권근영 기자

데미언 허스트는 …
‘해골’‘상어’등 엽기적 문제작 발표
악동서 부·명성 거머쥔 스타로 발돋움

“나도 이제 불혹을 넘겼는데 ‘yBa(young British artists)’가 웬말인가. ‘oBa(old British artists)’라고 해야 할 판 아닌가.”

최근 한 인터뷰에서 데미언 허스트는 이렇게 푸념했다. 허나 그가 아직 40대라는 게 되려 놀랄 일이다. 데뷔한 것은 이미 20년 전. 런던 골드스미스 칼리지의 학생이던 그는 88년 버려진 창고에서 ‘프리즈(Freeze)’라는 제목으로 자신과 동료 작가들의 전시를 기획해 이름을 날렸다. 젊은 작가를 발굴해 띄우는 데 귀신인 미술 컬렉터 찰스 사치를 만나 92년 사치 갤러리에서 ‘젊은 영국 예술가들(young British artists)’전에 참여했다.

소머리·상어·암세포 등 엽기적 작품에 그는 일관되게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는 메시지를 담는데 그 최고봉은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가득 박은 백금 해골 ‘신의 사랑을 위하여’(2006)다. 제작 당시 그는 “죽음은 꺼져버리라고 말하며 생을 찬양하고 싶었다”며 “죽음의 궁극적 상징인 해골을 사치·욕망·데카당스의 상징인 다이아몬드로 덮어버리는 것보다 이를 더 잘 표현할 방법이 있겠나”라고 설명한 바 있다.

젊은 나이에 이미 부와 명성을 거머쥔 그는 자선사업에도 힘쓰고 있다. 소아암 환자 돕기 단체에 연간 100만 파운드(약 20억원)씩 기부하고, 올 초엔 뉴욕서 아프리카 에이즈 환자 돕기 경매를 직접 기획하기도 했다.

데미언 허스트는 1965년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나 공업도시 리즈에서 자랐다. 자동차 세일즈맨이던 아버지는 12살 때 가족을 떠났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는 밴드 ‘섹스 피스톨즈’에 빠진 펑크족 아들을 다루느라 애먹었다. 그는 현재 12세·7세·2세의 세 아들, 부인과 함께 영국 남서부 데본에 있는 저택에서 살고 있다.

◇한국에서도 스타=한국에서도 데미언 허스트의 열기는 대단하다. 지난 3월 부산에서 열린 화랑미술제에서 내로라 하는 화랑들은 데미언의 평면 작업을 내걸었다. 스핀 페인팅, 색색의 점을 찍은 도트 페인팅 등이 인기였다. 마침 서울에선 그의 작품 세계를 일부나마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청담동 갤러리 인터아트는 다음달 31일까지 서랍 달린 가방에 십자가와 해골 오브제, 실크스크린으로 찍은 알약 그림 등을 담은 ‘새로운 종교’ 연작을 전시한다. 서울 삼성동 인터알리아에선 다음달 11일까지 거장들의 에디션 작품을 전시·판매하는데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린 해골 이미지의 실크스크린 등 데미언 허스트의 에디션 작품도 15점 나왔다. 또한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에는 그의 약장이,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는 ‘자비’라는 제목의 소녀상 등 그의 입체 작품 두 점이 전시돼 있다.

권근영 기자

경매 사이트에서 구매한 실제 사람의 해골을 백금으로 뜬 뒤 다이아몬드를 가득 박은 ‘신의 사랑을 위하여’. 치아는 원래 해골에 있던 것이다. 다이아몬드로 죽음을 뒤덮어버린 극도로 화려한 작품이다. 총 1106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들어간 이 작품의 가격은 918억원으로 매겨졌지만 아직까지 사겠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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