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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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남편은 펄쩍 뛰었다.생사람 잡는 소리를 한다며 제주댁을 마구비난했다.
『생각 좀 해봐요.막말로 내가 애소를 어떻게 해서 아이가 생겼다면 가만 있을 듯싶소? 당신하고도 이혼했겠다 당당히 결혼하지 뭘 망설이겠어.천지신명께 맹서코 나는 아니오.』 어이가 없었다. 『읍내까지 소문났다던데,당신이 아니라면 누구 아이란 말이에요.』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선웃음을 섞으며 딱 잡아떼는 그 단호함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헷갈렸다.애소의 상대가 남편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언뜻 일본말 요리책 생각이 났다.
선물받은 요리책을 읽어내기 위해 일본말 공부를 시작했노라고 애소는 말했었다.전공 공부를 계속하라며 애소에게 요리책을 사준사람.전공 공부와 더불어 일본말까지 배우도록 유도한 사람.퍽 슬기롭고 정다운 사람이거니 여겨졌지만 그가 누구 인가는 물어보지 않았다.애소의 아버지나 집안 어른이거니 단순하게 생각했고,애소도 그 사람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애소에게 요리책 사주신 적이 있어요?』 어쩐지 그 사람이 마음에 걸렸다.
『요리책? 일본말 요리책 말이오?』 남편은 그 책을 알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사주신 것같았소.애소가 자랑하는 걸 얼핏 들은 적이 있어.요리책은 왜?』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은 사람처럼 눈앞이 캄캄했다.
-시시콜콜히 딸에게 일상의 일을 보고하다시피 하는 아버지가 애소한테 요리책 사준 것은 어째서 말하지 않았을까? 설마하니…. 아리영은 현기증을 느꼈다.그것은 상상하기조차 힘겨운 일이었다.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있는 즉시 서울로 전화해달라고 당부하며다급하게 수화기를 놓았다.
곧장 서귀포로 전화했다.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채웠다.
나선생이었다.
『안녕하셨어요? 저 아리영이에요.어머님 계십니까?』 서둘러 묻는 아리영에게 나선생은 당황한듯 잠시 머뭇거렸다.
『아리영씨 뵈러 서울가셨는데 아직 안돌아오셨습니다.못만나셨습니까?』 『혹시 애소가 그리 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저의 아버지도 서귀포간다며 떠나셨다는데요.』 아리영은 어수선하게 거푸물었다. 『애소도 안왔고 아버님께서도 오시지 않았습니다만….애소 일로 크게 심려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나선생은 대답끝에 조신하게 사죄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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