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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화장한 와인과 화장하지 않은 와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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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인은 화장이 좀 짙어" 어느 와인 애호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가 캘리포니아 와인의 향기를 맡으면서 내뱉는다. 이 자리는 다양한 화이트 와인들을 시음하는 모임이었다.

통상 와인 시음 모임이라면 와인 별 특징에 따른 테마를 정해 약 6가지 정도의 비슷한 유형의 와인들을 모아 비교 시음하는 자리이다. 일반적으로 와인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식당이나 레스토랑을 잡아 7-8명이 모여 식사 이전 코와 혀의 감각이 민감할 때 와인 테이스팅부터 시작한다. 테이스팅이 끝나면 그에 어우러지는 음식과 매칭을 시도하면서 식사를 즐기는 형식이다.

이번 모임은 화이트 와인들의 집합.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다양한 포도 품종 별 테이스팅이었다. 레드 와인을 남성에 비유하라면 화이트 와인은 여성에 비유되는데, 와인의 여왕이라 일컫는 샤도네(Chardonnay)와 청순발랄 형의 달콤한 리슬링(Riesling), 갸냘픈 소녀와도 같은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왠지 촉촉하고 우울한 눈망울을 가진 여인의 모습이 연상되는 피노그리(Pinot Gris)…등의 와인들이었다.

'와인이 화장을 했다고?'라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와인도 오크통을 이용한 화장을 한다. 특히 와인의 여왕이라 불리는 샤도네(Chardonnay) 품종을 이용한 화이트 와인은 더욱 그러하다. 화이트이던 레드 와인이던 통상적으로 오크통(Oak 참나무통) 숙성을 통해 와인의 부케와 바디를 더하는 경우가 많다. 와인 시음회나 와인 메이커들과 함께 하는 디너 행사 자리에 가면 자주 듣는 이야기가 오크통 숙성이다.

일단, 오크통 숙성에 들어가면 와인의 향기는 단순히 와인의 향기(아로마 Aroma) 만을 풍기는 것 이상으로 더욱 복합적이고 아름다운 부케(Bouquet)를 발산한다. 즉, 과일이 주는 단순한 향기를 더해 생크림이나 바닐라 혹은 갓 구운 식빵이나 비스킷과 같은 구수한 향기를 발산하기도 하고 혀에서 느껴지는 와인의 질감은 강한 신맛과 까칠한 맛에서 매우 부드럽고 매끄러운 볼륨 감이 느껴지게 하기도 한다. 이는 고급 레드 와인에서 더욱 확실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복잡미묘한 향기와 함께 와인의 구조 감을 다듬어주고 매혹적이고 육감적인 매끄러움을 더해주는 것이다.

사실 오크통 숙성을 통한 와인 몸값은 더욱 높아지기 마련이다. 오크통 자체 가격이 매우 비싸기에 오크통 숙성은 주로 고급와인에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여성이 화장을 하고 코르셋으로 볼륨감 있는 멋진 몸매를 만들고 예쁜 옷을 입는 등 자신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꾸미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와인 메이커는 이러한 오크통 숙성의 정도를 결정하고, 그 와인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여 가장 맛있는 와인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크통의 구수한 향기와 매끄러운 느낌이 좋다고 하여 너무 과도하게 사용을 할 경우, 오히려 반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예전에 미국과 같은 신대륙 와인 산지에서는 오크통 숙성된 와인들이 한동안 인기를 얻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과도한 오크통 숙성을 통해 너무 바닐라 향기가 강하거나 느끼할 정도로 크리미한 느낌의 샤도네를 만들기도 하였다. 심지어 싸구려 와인에도 이러한 오크의 향기를 내기 위해 비싼 오크통 대신 오크 칩을 이용하거나 파우더를 이용한 적도 있었지만 이런 경우 오히려 역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이는 평소 화장을 하지 않는 시골 아낙네에게 요란한 화장과 싸구려 향수를 뿌려 더욱 부자연스럽게 변신시키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요즘은 이러한 오크의 무겁고 느끼한 스타일에서 탈출하여 진정으로 추구하는 오크의 역할을 잘 활용하여 좀 더 깔끔하고 세련된 맛을 표현하는 꽤 매력적인 와인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심지어 웬만한 프랑스의 세련된 특급 와인들을 누르기도 한다.

사람도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 더욱 아름다울 수 있듯, 와인에도 오크통 숙성을 오히려 하지 않았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와인들이 있다. 깔끔하고 상큼한 과실적인 신선미가 느껴지는 리슬링(Riesling)이나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과 같은 그린 톤의 청량감 있는 와인들은 그 대표적인 품종들인데 소비뇽 블랑의 경우 뉴질랜드에서는 아주 가끔 오크통 숙성을 하는 경우도 있다.

샤도네는 다양한 변신을 한다. 프랑스 샤블리(Chablis) 지방의 와인들은 모두 샤도네 품종 하나를 가지고 다양한 스타일의 샤블리 와인들을 만들어 낸다. 중저가의 샤블리는 매우 순박한 시골 처녀와 같은 깨끗한 이미지를 그대로 살려 오크통 숙성을 하지 않으며 프리미에 크뤼 등급 이상의 고급 와인들은 마치 세련된 귀족 부인처럼 우아하고 화려한데 장기간 숙성을 통해 더욱 깊은 맛을 보여 주기도 한다.

오크통 숙성의 정도는 포도품종의 캐릭터를 잘 읽어 내어 완성하게 되는 와인메이커의 작품이기도 하다. 와인 메이커는 자신이 추구하는 스타일에 따라 프랜치 오크통 내지는 아메리칸 오크통을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 둘을 혼합하기도 한다. 오크통 숙성 정도에서도 다양한 스타일이 나오는데, 장기간 오크통 숙성을 하기도 하고 살짝 오크통에 넣어다 빼는 가벼운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요즘처럼 태양이 뜨거운 여름철에는 오크통에서 숙성된 와인들보다는 오크통 영향을 받지 않은 과일 같은 와인들이 더욱 깔끔하고 싱그럽게 와 닿을 수 있다. 아마도 살짝 화장한 여인처럼 약간의 오크통 숙성 와인들은 더욱 기분 좋게 할 수도 있겠다.

더운 여름철 짙은 화장은 우리를 더욱 덥게 한다. 오히려 화장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더욱 돋보일 수 있듯, 여름철 싱그럽게 와 닿을 수 있는 상큼한 와인들을 추천한다.

에스쿠도 로호 샤도네, 루이 라뚜르 샤블리, 킴크로포드 말보로 소비뇽 블랑(왼쪽부터)


◇ 에스쿠도 로호 샤도네 (Escudo Rojo Chardonnay), 칠레
최근 출시된 이 와인은 칠레의 다른 샤도네와 달리 오크향이 강하지 않아 깔끔한 맛을 낸다. 프랑스의 유명와인회사와 합작해서인지 프랑스 풍이 살짝 느껴지나 너무 드라이하지 않고 부드러운 느낌의 화이트 와인. → 이 와이너리의 사장은 브라질의 멋진 여인이 연상된다고….

◇ 루이 라뚜르 샤블리 (Louis Latour Chablis), 프랑스
한때 바다였던 샤블리 지역은 조개 껍질이 많이 발견되는 토양을 가지고 있어서 인지 미네랄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화이트 와인이라 조개구이나 해산물과 함께 했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와인. → 이 와인은 바닷가에서 수영을 막 즐기고 나온 젊은 해녀 같다고나 할까?

◇ 킴크로포드 말보로 소비뇽 블랑 (Kim Crawford Marlborough Sauvignon blanc), 뉴질랜드
소비뇽블랑 품종으로 만든 와인으로는 뉴질랜드산을 아직까지도 많이 꼽는다. 생선회나 초밥과도 시도해볼 만한 이 와인은 파인애플, 구즈베리와 같은 과실향이나 금방 자른 잔디의 향기가 느껴지는 깔끔한 맛의 와인. → 화장기 전혀 없는 소녀 같은 숙녀가 연상되는 와인.

최성순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