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매국노” 날 선 대치 … 광복 직후 좌·우 대결 연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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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밤 서울 여의도 KBS 본사 앞에서 농성 중이던 보수단체 회원들(뒷모습 보이는 사람들)과 서울시청 앞에서 촛불집회를 마치고 온 시위대가 언쟁을 벌이고 있다. [사진=박종근 기자]

촛불시위의 양상이 바뀌고 있다. 시위대와 정부의 대결에서 진보와 보수 간 ‘좌·우 대립’으로 번지고 있다. 온-오프라인에서 격돌하는 양측의 물리적·언어적 폭력도 수위가 높아 지고 있다. 1945년 광복 직후 좌·우 대결을 연상케 할 정도다.

24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선 다음의 ‘아고라’ 회원 200여 명이 ‘공영방송 사수’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전날 촛불집회 참가자와 ‘정연주 사장 퇴진, KBS 특별감사 실시’를 촉구하는 보수단체 회원들 간에 물리적 충돌을 빚었던 곳이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이날 KBS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경찰이 피해자와 목격자들이 넘긴 현행범을 도피시켰다. 각목과 쇠파이프가 발견된 폭력단체의 차량을 경찰에 증거로 인계하려 했으나 경찰은 출입을 원천 봉쇄했다”고 주장했다. 대책회의는 짐칸에 피켓 수백 개와 각목·쇠파이프·분말소화기·플라스틱 기름통이 담겨 있는 2.5t 트럭을 공개했다. 트럭은 대책회의 측이 ‘증거’라며 모처로 끌고 간 것으로 전해졌다.

영등포경찰서는 “대책회의 측이 각목이 실린 차량을 경찰서로 끌고 왔지만 보수단체가 아닌 다른 사람 소유의 차량이고 범죄에 이용됐다는 증거가 없다. 필요하다면 영장을 받아 압수한다는 방침”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피해자·목격자 진술 등을 토대로 피의자를 추적하고 있다. 앞서 23일 KBS 앞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에게 린치를 당한 아고라 회원 박미라(49·여)씨는 면목동 녹색병원에 입원 중이다.

아고라 회원들에게 끌려 다니며 물병 등으로 얼굴을 가격당한 박찬성(55) 반핵반김국민협의회 대표는 “왼쪽 눈에 끼고 있던 콘택트렌즈가 찢어져 눈에 상처를 입었고 오늘(24일) 수술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7시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선 광우병 국민대책회의가 주최한 촛불집회가 열렸다. 참석자 800여 명은 광장에서 세종로로터리까지 1~2차로를 점거, 30분간 행진했다. 이들은 오후 9시부터 촛불집회의 방향을 놓고 토론회를 벌였다.

25일엔 전직 북파공작원(HID) 출신 모임인 대한민국특수임무수행자회 회원 300여 명이 대책회의 주최 촛불집회가 열리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6·25 58주년 기념행사를 연다.

◇폭력 시위 3명 구속=거리에서의 좌·우 충돌은 온라인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네이버에서 ID ‘wankian’은 “촛불 든 빨갱이들은 민주 사회에서 떠나라. 온 국민이 일어나 빨갱이들을 쳐 죽여야 한다”고 썼다. 다음에서 ID ‘글사랑’도 “여성 촛불시위자가 맞을 짓 했다. 보수세력은 애국자”라고 주장했다.

반면 ID ‘success’는 “이번 기회에 이 땅에서 매국노들을 모두 몰아내자. 매국노를 청산하면 사회 분위기가 맑아져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고추장’은 “일본과 합세해서 민족을 괴롭혀 놓고 보수인 것처럼 행세한 놈들은 김일성·김정일과 똑같은 놈들이다”고 썼다.

자정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다음에서 ID ‘근데요’는 “남의 의견이 나와 다르다고 상대방을 폭력으로 제압한다면 반드시 법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 50~60년 전의 좌·우 불화가 6·25를 불러왔고, 국가 분단의 불행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ID ‘ccyy9040’은 “촛불집회가 점점 진짜 전쟁을 축소한 전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이날 전경버스에 방화를 시도한 연모(31)씨와 망치로 전경버스를 부순 유모(24·일명 ‘망치남’)씨 등 3명을 구속했다. 경찰은 또 13일 MBC를 항의 방문, LPG통에 불을 붙이는 등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고엽제전우회 소속 회원 12명에 대해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글=이충형·강기헌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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