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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청소년들에 맘붙일 데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몇 주일 새 젊은 인기 가수들이 차례로 죽었다.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데 남은 가족과 친지들의 아픈 마음을 생각하면 요절한그들을 함부로 미화하거나 매도해서는 안될 일이다.
하루에도 몇 명씩 젊은이들이 소리소문없이 목숨을 끊는 세상이니 우연찮게 유명인들이 한꺼번에 죽었다 생각하고 잊어버리면 그만일 수도 있다.또 자칫 요란하게 떠들다 보면 모방심리와 피암시성(被暗示性)이 강한 청소년들이 자살을 따라 하 는 집단 히스테리 (Mass Hysteria)현상도 올 수 있기에 언론의선정성을 더욱 배제해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우려했던 대로 한 여학생이 이들의 사진을 앞에 둔 채비슷한 방법으로 목숨을 끊었다.게다가 지금은 입학시험으로 학생들이 모두 제정신이 아닌 때가 아닌가.이제 곧 합격자와 불합격자가 가려지면 많은 청소년들이 패배감을 못이겨 이들처럼 목숨을끊으려 들면 어쩔 것인가.마음 둘 곳 없는 우리 자녀들의 절망이 연예인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행여 증폭될까 두렵기까지 하다.
지금 우리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에 별 문제가 없고 교육환경도 쾌적하다면 어쩌다 젊은이 몇이 자살했다고 해 수선스럽게 굴 것도 없다.하지만 요즘 우리 청소년들의 현실은 어떤가.하루종일 좁고 불편한 교실에서 생활과는 무관한 죽은 지식이 나 앵무새처럼 따라해야 하며,그것도 모자라 새벽 두 세시까지 과외다,독서실이다 뛰어다니고 있다.아마 어른들 보고 이런 식으로 살라고 한다면 민중 봉기가 일어나도 벌써 일어났을 것이다.오죽하면 콧수염도 보숭보숭한 어린 것들이 폭력서클 을 만들어 막돼먹은 어른들 흉내를 내겠으며 얼마나 정붙일 사람이 없으면 연예인들에게열광해 까무라치기까지 할까.
소위 「어르신」이라는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들이 줄줄이 구속되고,백화점과 다리가 무너져 죄없는 목숨들이 파리처럼 죽어가는 시대,우리 청소년들은 의지하고 따르며 배울 대상을 이미 오래 전에 잃어버렸단 얘기다.사제지간의 따뜻한 정은커녕 촌지와 성적매김에 멍들어 서로 의심만 하고,가정에서도 출세와 치부에 바쁜부모들은 자녀의 가슴이 썩어들어간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배웠다는 이들,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의 허위의식이 순수한 청소년들의 눈에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보일까.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나마 청소년의 메마른 정서를 위로해주는 이들은 젊은 연예인들밖에 없단 뜻이다.연예인들이 연달아 죽었다니 괜스레 걱정이 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까짓거 적자생존의 치열한 경쟁시대,죽을 놈은 죽고 살 놈은 살 라는 배짱으로 자녀들을 방치하겠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생때같은 내 새끼들이 무슨 공포영화처럼 기성세대에 휘둘린 유약한 젊은 스타들을 따라 미치고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이번 기회에 청소년들의 고유한 하위문화(Subculture)에 대해서도 좀더 진지하게 접근하고 고민해봐 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선 영상매체 등을 제외하고는 젊은이들이 즐길만한 문화공간이없기에 기성세대들의 상업적 계산이나 부패한 농간에 춤추기 쉽다는 점,대중예술과 고급예술이 철저히 양분돼 청소년들이 이를 통합할 주체적 능력을 키우기가 힘들다는 점,공식적 인 문화시장은경직돼 있고 대중문화는 천박해 그야말로 예술다운 예술을 즐길 기회가 드물다는 점 등이 청소년문화의 큰 문제점이란 생각이다.
무엇보다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오게끔 기성세대들이 절도있고 교양있게 살았다면 감상적인 몇몇 연예인들이 죽었다고 요란스레 굴 필요도 없을 터다.우리중 누가 살기가 이리도 고달픈 청소년들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있겠는가.
(신경 정신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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