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선 이 만년필을 중요 계약에 서명하는 파워펜이라 부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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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몽블랑은 만년필이 명품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브랜드다. 독일에서 탄생해 102년 된 이 회사는 별 문양이 새겨진 만년필을 최고경영자(CEO)들의 양복 앞섶에 꽂아 넣었다. ‘마이스터스튁 149’ 만년필(사진右)은 1924년 출시 후 몽블랑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한국에서만 3만6000여 개, 130억원어치가 팔렸다.

“미 뉴욕 월가에서 몽블랑은 ‘파워펜’으로 불립니다.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중대 계약서에 서명할 때 꺼내 드는 펜이라는 뜻이지요.”

이 회사의 루츠 베이커(53·사진左) 대표는 “세상이 빠르게 변할수록 빨리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랑받는지 모른다”고 했다. 손으로 글을 쓰는 문화가 사라져가는 것이 역설적으로 명품 필기도구의 향취를 키운다는 것이다.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상’을 이세웅 신일문화재단 이사장에게 수여하려고 방한한 그를 최근 서울 신라호텔에서 만났다.

-PC와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손으로 글씨 쓰는 일이 준다. 만년필에는 위기 아닌가.

“컴퓨터가 우리 사업을 위협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많은 이들이 장시간 모바일폰과 PC·블랙베리로 소통하는 건 맞다. 하지만 그럴수록 손으로 쓴 글의 가치는 커진다.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하거나 사랑을 전하고 싶을 때 보통 손으로 글을 쓴다. 육필(肉筆)이 문화적 의미를 가질수록 어떤 종이에, 어떤 도구로 글자를 쓰는가가 관심사다. 단순한 필기도구가 아니라 마음이 담긴 펜, 마음이 담긴 종이를 찾게 된다.”

-상영 중인 할리우드 영화 ‘섹스 앤 더 시티’에선 남녀 주인공이 e-메일로 사랑을 확인한다. 신세대들에겐 손으로 글 쓰는 문화가 약하다.

“(웃으며) 나도 그 영화를 봤다. 예외적인 경우 아닌가. 수백 년 지난 고전 음악·미술이 현대에도 사랑받는 걸 보라. 세상이 빠르게 변할수록,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는 경향이 있다. 이건 신세대들도 인정할 거다. 17세 된 내 아들에게 ‘입던 스웨터를 물려주마’라고 하면 시큰둥할지 모른다. (앞섶에서 만년필을 꺼내며) 하지만 몽블랑 만년필이라면 표정이 다르지 않을까.”

-한국에서도 몽블랑을 성공 비즈니스의 상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

“바쁘게 새로운 걸 찾아다니는 비즈니스맨들은 본능적으로 균형 잡힌 삶을 원한다. 예술과 공연을 접하며 휴식하는 것, 지적인 충만감을 찾아나서는 것은 삶의 배터리를 충전하는 방식이다. 몽블랑 브랜드가 이런 식의 만족감을 좀 주는 게 아닌가 싶다.”

-1992년부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번 같은 문화예술상을 수여하고 있는데.(*후원국이 11개국으로 늘고, 한국은 4회째 시상)

“변하지 않는 것의 가치, 깊이 있고 느린 삶의 가치를 성원하는 것이 몽블랑의 정신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만년필을 생산라인이 아닌 손으로만 만들기 시작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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