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라의KISSABOOK] 철딱서니 없는 우리 아빠 하지만 내겐 소중한 우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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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밥상에 앉기 전에는 수저를 들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의 아버지는 우상이었다. 하지만 추락하는 것은 원래 날개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난공불락이라 믿었던 가부장제의 위력이 한 세기 만에 이렇게 맥없이 무너질 줄이야.

F학점 낙제 아빠로 낙인 찍힌 아빠들을 위해 가쿠다 미쓰요의 『납치여행』(해냄)을 소개한다. 아무리 현실을 반영한다 해도 부모의 모습이 미화되게 마련인 동화와는 달리 소설답게 현대의 무기력한 아빠를 바라보는 어린 딸의 시각을 적나라하게 투시한다. 동화는 아니지만 읽기 내공이 단단한 고학년이라면 함께 읽어도 큰 무리 없는 가족소설이다.

납치여행이라! 제목 한 번 희한하다. 무슨 아빠가 자기 딸을 유괴하나. 유괴범 주제에 여행은 또 무슨 여행? 엄마하고 협상할 게 있어서 딸을 인질로 잡은 거란다. 어이가 없었지만 딸 하루는 쩔레쩔레 따라간다. 가출했다 불쑥 나타난 아빠가 그리웠던 거다.

하지만 실망연발. 아빠는 믿음직한 구석이라곤 요만큼도 없다. 계획성은커녕 철딱서니조차 없다. 즉흥적이고 감상적이기까지 한 한심한 유괴범과의 정처 없는 여행길. 당연히 좌충우돌 시행착오의 연속일 수밖에.

그런데 길 위에서 함께 한 시간이 마법을 부린 걸까. 처음에는 집에 못 갈까 봐 걱정이던 하루가 이제는 헐렁헐렁한 아빠하고 달아나자고 한다. “엄마가 처음 아빠를 만났을 때도 아마 저랬을 거야. 많은 사람들 속에 혼자만 유독 반짝거렸겠지.” 집에 보낼 기차 비도 없는 가난뱅이 아빠가 좋아져서 이런 말을 하다니? 꾀죄죄한 아빠가 딸에게만은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이 유쾌하고도 가슴 찡하다.

드물게 만나보는 스페인 작가 마누엘 알론소의 『남쪽으로』(다림) 역시 오랫동안 떨어져 살던 아빠하고 딸의 여행을 다룬 작품이다. 도둑질도 개의치 않는 아빠와 히치하이크로 희망의 바다를 찾아 떠난 클라라가 마침내 바다에서 발견한 건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특유의 무뚝뚝한 문장으로 부녀관계를 이렇게 정의한다. 내가 네 친아빠라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네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란 게 중요한 거라고.

“아빠, 다음에 또 유괴하러 와야 해.” 하루의 사랑스럽고도 가슴 아픈 마지막 말이다. 내 아이도 아빠와의 농밀한 추억에 목말라 이렇게 애원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대상 독자는 이벤트성 소나기 사랑을 주는 아빠가 낯설기만 한 12세 이상의 어린이와 함께한 일이 해준 일보다 중요하다는 걸 모르고 산 아빠들. <동화작가>

임사라<동화작가> romans82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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