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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職이 할 일 장관이 결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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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고시 출신이 관료사회에 들어오면 너나없이 맛없는 정부미가 된다." "주사(主事)일을 장관이 해서야 말이 되나." "관료 조직에 기름이 너무 많이 끼어 있다."

배국환(裵國煥.48)행정자치부 지방재정국장이 3일 정부 중앙청사 별관에서 열린 '변화와 혁신 연찬회'에서 관료 사회의 무능과 비효율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裵국장은 이날 종합토론회 직전 자신의 주장을 요약한 '관료사회, 정말 변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제목의 18쪽짜리 자료를 참가자들에게 돌렸다. 연찬회에는 박주현(朴珠賢)대통령 비서실 참여혁신수석과 김주현(金住炫)차관 등 행자부 4급 이상 간부 200여명이 참석했다. 허성관(許成寬)장관은 제주도에서 열린 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하느라 불참했다.

裵국장은 토론에서 "정부미(관료)와 일반미(민간)는 맛과 가격이 다르다"고 말문을 뗀 뒤 "관료들은 정부미가 일반미보다 우수하다고 착각한다"고 포문을 열었다. 공무원은 민간이 갖지 못하는 법률 집행권과 정보를 갖고 독점적 지위에서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에 우수해 보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미도 '철원 청결미'나 '이천 임금님표 쌀'처럼 비싸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裵국장은 이어 "관료는 아직도 농업국가시대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며 "조선시대보다 못한 승진 시스템이 대표적"이라고 꼬집었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조광조(趙光祖)는 임용 3년 만에 대사헌으로 승진했으나 500년이 지난 요즘 5급 사무관이 1급이 되기 위해 29년이 걸린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그는 "나이와 경력이 벼슬"이라고 꼬집었다. 공직사회가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민간의 피를 수혈하고 능력주의 인사를 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쓴소리는 계속됐다. 그는 "각 부처는 불필요한 조직을 스스로 줄이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국민의 요구나 행정 수요와 상관없이 조직은 늘어난다는 '파킨슨의 법칙'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는 "갑옷의 무게가 70㎏인 유럽의 흑기사가 갑옷 7㎏인 유목민의 전사를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라며 "공무원 조직이 비만으로 갖가지 질병이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공무원의 신분보장을 철폐하고 '철밥통'이라는 말을 수치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裵국장은 "주사가 해야 할 사소한 일까지 장관이 결재해서는 발전이 없다"고 덧붙였다. 책임 회피용으로 결재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위에서 챙기니까 중간관리자도 연쇄적으로 챙기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했다. 그는 "결재 단계를 줄이지 않고는 속도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기자와의 통화에서 裵국장은 "평소 생각하고 있던 공직사회의 문제점을 말한 것"이라며 "많은 공무원이 '시원하다'며 공감을 표시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행자부 내 일부 공무원들은 "장점은 빼버리고 단점만 너무 부각한 것 아니냐"는 부정적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裵국장은 행정고시 22회에 합격, 기획예산처 예산총괄과장 등을 지냈으며 지난 2월 중앙부처 국장급 인사 교류에 따라 행자부로 자리를 옮겼다.

김상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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