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함께>'부자의 그림일기'펴낸 만화가 오세영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만화가 오세영(吳世榮.40)씨는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작가다.
이현세.박봉성등 유명 만화가들과 달리 그는 소리없이 자신의 세계를 가꿔왔다.그의 명성은 오히려 만화동네에서 높다.높은 예술성과 실험성으로 한국만화의 자존심을 세운 몇 안되 는 작가중 한사람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런 吳씨가 86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우리 사회의 구석진부분을 파헤친 『부자의 그림일기』(글논그림밭刊)를 펴냈다.모두가 떠나버려 정적만 맴도는 농촌,숨막힐 듯한 조직에 파묻힌 도시인의 고독,가난한 이웃들,80년 광주의 비극적 상흔,남북분단으로 고통받는 실향민의 비애,일확천금을 꿈꾸다 파멸하는 현대인의 물욕 등 13편의 단상을 통해 우리의 뒤틀린 얼굴을 섬세한필선으로 껴안는다.
고도로 압축된 이미지와 군살없는 대화,그리고 진지한 문제의식이 겹치면서 마치 한편의 사회소설 혹은 실험영화를 보는 듯한 분위기다.맛도 있고 영양가도 높은 음식을 곱씹는 것같다.이른바만화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통속만화에서 찾을 수 없는 그윽한 회화미가 배어나온다.
『이제 만화도 예술의 한 분야로 당당하게 진입해야 합니다.만화는 문학적 상상력과 회화적 이미지,그리고 영화의 연출기법이 결합된 분야여서 표현영역이 무한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吳씨의 소망과는 거리가 멀다.일반인들 사이에선 아직 만화는예술보다 저급한 작업이라는 인식이 폭넓게 자리잡고 있다.이에 吳씨는 한국만화가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만화 역시 다른 예술장르처럼 세상의 충실한 반영을 생명으로합니다.사물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작가의 눈이 핵심이지요.』 吳씨는 한국만화의 발전을 가로막는 암초로 배본소를 중심으로 하는 유통시장과 일본만화의 무분별한 수입을 든다.만화를 1회성 소모품에 그치게 하는 대본소 체제가 계속되는한 작가들의 진지성을 기대하기 어렵고 또 일본 오락만화만 일방적 으로 들여오는 왜곡된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한 만화를 보는 일반인들의 편견을 돌릴 수 없다는 것.
『만화도 문학처럼 서점에서 승부가 나야 합니다.예술성이 풍부한 작품은 영원히 살아남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입증해야죠.』 吳씨의 작업에 분수령을 이룬 사건은 80년 광주민주화항쟁.기술적문제에만 주력하며 습작단계에 머물렀던 그를 완전히 탈바꿈하게 했다.친구들에게 들은 광주의 실상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새롭게 생겼다고.이후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등의 소설과 다양한 사회과학서적.잡지등을 탐독하며 작품.세계관등을 정립해 나간다.吳씨는 이후 우리의 냄새가 가득한 작품에 매달려 한국사회에 만연한 소외를 해소하는데 일조가 되는 그림에 주력한다.이런 측면에서 만화는 가장 치열한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정말 힘들었을때는 1주일도 굶었어요.이웃사람들에게 부끄러워 다른 동네에서 산 봉지쌀이 터져 길에 널린 쌀을 주워올릴 때는 눈물도 흘렸지요.남들처럼 적당히 유명작가를 흉내내면 여유있게 지낼 수 있어 아내와도 자주 다투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이후 지금까지 독학으로 만화에 정진,남은 재산이 역사.미술.
문학.영화서적 1만여권이라는 吳씨는 앞으론 직접적인 사회비판보다 인간의 본질 혹은 참된 가치를 담은 작품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고향인 충남 공주의 작은 산골마 을을 배경으로 해방 전후의 사회상을 10여명의 화자 속에 투영한 작품은 구상을 마쳤다고 한다.
박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