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보기>비밀장부에 쓴 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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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과거의 어두운 터널을 빨리 빠져 나오려면 두 전대통령의 죄과(罪科)를 신속히 규명해야 한다.특히 사상최대의 부정축재 의혹을 받고 있는 노태우(盧泰愚)씨의 죄과를 입증하려면 그의 비자금 출입 장부를 압수하는 것이 첩경이다.그러나 그 에게 비밀장부가 있었는데도 사건 표면화 직후 파기돼 없어졌다.이런 사실조차 재판 첫날에야 세상에 알려지다니 천려일실(千慮一失)이 아닐수 없다.
장부는 모두 네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가장 유력한 증거물이 됐을 이 비밀장부에 그는 어떤 내용을 기록했을까.아마 인상적인 수금(受金)이나 파국의 순간만은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어놨을 것이다.
□ 88년 8월 모일.A회장을 만났다.그는 상속 재산을 동생들에게 분배하지 않고 자신이 모두 차지하려 한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나는 당신들 내부 싸움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말했다.그는 죄송하다며 성금을 냈다.나는 그에 게 형제간 우애가 돈독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대가(代價)를 톡톡히 치러야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셈이다.
88년 12월 모일.B회장을 만났다.그는 우리 사돈이다.성금을 내밀길래 『뭘 사돈 기업까지 이런 것을….』 하면서도 얼른받았다.당에서 돈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치니 난들 어떡하겠는가.
91년 4월 모일.C회장을 만났다.그는 낙동강 페놀 방류사건을 일으켜 죄송하다며 성금을 내밀었다.그 기업은 이번 사건으로큰 곤욕을 치렀는데 나에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91년 9월 모일.D회장을 만났다.그는 열달전 그룹 총회장의 취중(醉中)실언을 용서해달라며 성금을 내밀었다.그 회장은 90년 11월 청와대 공식 만찬에서 과거 정권은 모두 군사독재정권이라고 말한 바 있다.여러 경로를 통해 내가 불 쾌해한다는소식이 전달되자 성금을 갖고 들어온 것이다.올바른 소리를 한 사람으로부터도 돈을 울궈내는 권력의 이 짜릿한 맛이여.누가 말했던가.권력은 최음제(催淫劑)라고.키신저였든가.
93년 2월 모일.이제 나는 대통령이 아니다.그런데 돈이 산더미처럼 쌓여 큰일났다.나중에 누가 묻는다면 사회에 환원하려고남겼다고 하지 뭘.
95년 10월21일.이현우(李賢雨) 실장이 헐레벌떡 뛰어와 신한은행 서소문지점 계좌번호 302-38-001672의 100억원짜리 차명계좌가 혹시 우리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비밀장부를뒤져보니 맙소사 우리 것이다.아니 대선(大選)자 금 기록도 상세히 적혀 있잖아.이것이 밝혀지면 세상이 얼마나 혼란에 빠지겠는가.당장 장부를 없애라.파쇄기(破碎機)에서는 비밀장부가 조각이 돼 흘러 나왔다.수사반원이 들이닥쳐도 이 엇갈린 열네자 만은 알아볼 수 없을 걸.
92 기 년 에 대 기 선 록 자 돼 금 있 여 다 □ 노태우씨의 증거인멸이 완벽했을까.그러나 이현우씨의 일기가 있다.
「95년 10월21일.연희동에서 盧각하와 함께 장부를 파쇄하려니까 비서실에 있는 파쇄기가 고장났다.盧각하가 스스로 파쇄하겠다며 2층으로 가지고 간 뒤 빈손으로 내려왔다.나는 그가 장부를 파쇄하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수석 논설위원)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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