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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고는 죽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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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레간자·세피아·누비라·엑센트·봉고…. 이미 단종돼 한국에서는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는 차종이다. 하지만 이 차들은 사라진 게 아니다. 달리는 무대가 바뀌었을 뿐이다. 바다 건너 아프리카·중동·동남아·중남미 지역에서는 지금도 도로를 쌩쌩 달리고 있다.

국산 중고차의 수출이 다시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중고차 수출은 22만 대, 8억2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금액 기준으로는 사상 최고치다.

◇나라마다 인기 모델은 제각각=1997년식 레간자 자동변속기 모델을 국내 중고차 업자에게 넘기면 100만원 정도 받는다. 하지만 수동변속기 모델이라면 두 배까지 받을 수 있다. 레간자는 대부분 수출되는데, 수출차의 경우 자동보다는 수동변속기 모델이 귀하신 몸이다. “대부분 자동차를 생산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차가 고장나면 부품을 수입해야 하는데, 수동변속기가 훨씬 싸기 때문”이라는 게 김형규 중고차수출조합 회장의 설명이다.

나라마다 지리적 조건과 규제가 다르기 때문에 국산 중고차 인기 모델도 제각각이다. 중동·북아프리카 국가는 1500cc급 준중형차가 잘 팔린다. 한국산 중고차가 중고차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요르단에서는 기아 세피아가 단연 인기다. 이집트는 대우의 ‘누비라’가 도로를 누비고 있다. “중고 누비라는 다 이집트에 가 있다고 보면 될 정도”라고 한다.

기후가 혹독하고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러시아는 튼튼하고 강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선호한다. 갤로퍼·테라칸·싼타페(현대), 쏘렌토(기아) 같은 것이 인기 차량이다. 최근 수출이 급증하고 있는 베트남은 경차 마티즈와 1t 트럭이 주종이다. SK엔카 박성철 사장은 “베트남이나 우크라이나의 경우 현지 신차에는 선루프 같은 고급 옵션을 달 수 없어 풀옵션인 한국산 중고차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고 말했다.

◇품질로 승부, 마케팅은 뒤져=1980년대 후반 시작된 중고차 수출은 외환위기 이후 환율 급등 덕분에 급성장했다. 수출시장도 페루·코스타리카·과테말라 등 중남미 지역에서 중동과 북아프리카로 확대됐다. 하지만 2005년 이라크 정부가 2004년 이전 생산된 중고차의 수입을 전면 금지하면서 위기가 닥쳤다. 2004년 31만 대를 넘었던 중고차 수출 대수는 2005년 19만 대로 급감했다.

이에 수출업자들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동남아와 독립국가연합(CIS) 국가를 본격적으로 뚫기 시작한 것이다. 이 지역 수출은 크게 늘어 지난해 처음으로 중동지역을 추월했다. 특히 ^일본 차와 달리 운전석이 왼쪽에 있고 ^차값이 상대적으로 싼 데다 ^품질도 좋은 것이 인기 요인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중고차 130만 대를 수출한 일본과 비교하면 아직 6분의 1 수준이다. 무역협회는 “일본은 중고차 수출 대수가 신차 수출의 20% 수준인 데 비해 우리나라는 아직 8%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일본의 경우 요코하마와 두바이 등 국내외에 대규모 물류단지를 조성하며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500여 개 수출업체는 대개가 그린벨트 지역에 불법으로 차를 보관하는 영세업체다.

김형규 회장은 “중고차 수출은 부가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신차 시장을 선점한다는 의미도 있다”며 정부·지자체의 정책적 지원을 당부했다.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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