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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한국어의 질감 외국가수는 모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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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테너 김우경<上>이 ‘마술피리’의 타미노를 연기하고 있다. 이 극장에서 연출자는 타미노를 제외한 다른 출연자들의 우스꽝스러운 면을 강조했다. 타미노는 신중하고 고민이 많은 인물로 그려진다.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 극장 제공]

독일 드레스덴의 젬퍼 오페라 극장이 매 시즌 올리는 ‘마술피리’에는 한글이 등장한다. 한글은 사랑하는 여인 파미나를 찾아다니는 주인공 타미노의 애절함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무대 양 옆에 놓인 푸른색 칠판에 다가간 타미노는 “파미나” “사랑해”를 큰 글씨로 쓴다. 유쾌한 새잡이 파파게노가 까불며 노래를 부르는 사이 타미노는 조용히 글씨를 덧칠한다. 글씨의 크기가 점점 커진다. 커져만 가는 타미노의 그리움을 표현하는 장치다.

독일 오페라 극장에 한글이 등장한 것은 테너 김우경(32·사진) 때문이다. 유머러스하고 심플한 해석으로 유명한 오페라 연출자 아힘 프라이어에게 “칠판에 한글을 써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한 것이 김우경이다. 뮌헨 음대를 갓 졸업해 무명이던 그는 27세에 이 극장에 전속 가수로 영입되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프라이어의 2006년판 새 연출 ‘마술피리’에 출연하면서 한글을 제안했다. 지난해 7월 계약기간이 끝나 ‘프리 선언’을 했지만 드레스덴은 ‘마술피리’를 공연할 때마다 김우경을 캐스팅한다.

한글을 쓰는 타미노, 김우경이 첫 앨범에 한국 가곡을 선택했다. ‘얼굴’ ‘가고파’ ‘못잊어’ 등 13곡이 담긴 ‘한국 가곡(Korean Songs)’(음반사 MSM)은 이달 영국에서, 두달 후 한국에서 출시된다.

“음반 제작자와 소통에 문제가 조금 있었어요.” 지난달 말 드레스덴에서 만난 김우경은 “한국 가곡을 녹음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첫 녹음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불렀는데 제작자가 그만 첫번째 녹음으로 음반을 내놨다”는 사연을 들려줬다.

“오페라 아리아를 녹음했다면 이런 실수는 없었을 거예요. 한국 가곡에 생소한 영국인 제작자에게는 두 녹음이 비슷하게 들렸겠죠.” 음반사는 수백 장 찍은 앨범을 폐기처분하고 제작을 다시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한국 가곡의 녹음을 고집한 이유는 뭘까. “마술피리에서 한글을 쓴 것과 비슷한 이유예요. 유럽 가수들과 똑같이 하면 의미가 없잖아요.”

테너 김우경은 독일 뮌헨으로 유학을 떠나면서부터 ‘유럽은 내 무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자연스럽고 감정이 풍부한 음색으로 유럽 청중의 호평을 받고 있다. [중앙포토]

그는 유럽의 가수들과 거침없이 부딪히며 ‘맷집’을 키웠다. “한 번은 저보다 적어도 20cm는 큰 이탈리아 소프라노와 노래해야 할 때가 있었어요. 다들 ‘동양인의 약점’이라며 수근거렸죠.” 그는 “처음에는 주눅이 들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키 차이가 나는데도 노래로 청중을 녹일 수 있는 것이 한국인인 나만의 강점이라고 생각을 바꿨죠”라고 말했다.

차별도 많이 겪었다. “마늘 냄새 때문에 같이 연습할 수 없다”고 항의하는 동료도 있었다. 김우경은 그의 코앞에 다가가 “나는 마늘을 먹어서 노래를 잘하기 때문에 당신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앨범 ‘한국 가곡’에서도 이런 그의 정체성이 느껴진다. 그가 전달하는 모국어의 질감이 맛깔스럽다. 드레스덴 무대 위 ‘마술피리’의 타미노로서 김우경의 소리는 가볍고 맑았다. 음색은 감정이 변할 때마다 민감하게 바뀌었다. 한국 가곡을 부르는 김우경은 좀 더 편안하다.

세계 진출 선배 격인 소프라노 홍혜경(49) 또한 5년 전 앨범 ‘한국 가곡집’(음반사 EMI)을 내놓은 적이 있다. ‘그리운 금강산’으로 시작해 ‘내 마음’ ‘사랑’ 등을 녹음했다. 파리 앙상블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할 예정이던 영국인 지휘자는 생소한 작품들의 연주에 난색을 표했다. 결국 지휘자는 한국인으로 바뀌었다. 그 어느 때보다 한 음 한 음에 신경을 쓰며 한국 시어의 의미를 전달하던 홍혜경의 모습이 이 앨범의 ‘메이킹 필름’에 잘 나와있다.

한국 가곡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홍혜경과 김우경은 지난해 1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라트라비아타’ 남녀 주역을 맡았다. 이 극장에서 한국인이 동시에 주연으로 노래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오는 10월 이 두 성악가는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라보엠’의 주역으로 함께 무대에 선다.

음악 칼럼니스트 정준호씨는 “외국 성악가들이 내한 공연에서 간혹 한국 가곡을 부르고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가 있었나’라며 감탄한다. 한국 가곡의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증거다. 세계에 진출한 한국 성악가들의 노력은 그 도화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드레스덴(독일)=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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