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85. 우리 말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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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남편 게디니<中>가 항상 “내 딸”이라고 부르는 정아<左>, 카밀라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남편 아르만도 게디니에게 가장 고맙게 생각하는 건 아이들에 대한 것이다. 남편으로서 A+였던 그는 두 딸의 아버지로서도 만점에 가까웠다. 아이들이 초등생일 때 숙제를 봐주거나 학습지도를 해주는 것도 남편 몫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박식함이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은 물론 미국 문화사를 꿰뚫고 있었던 남편은 정치·예술 등 모든 분야에 해박했다. 특히 큰딸 정아가 영향을 크게 받았다. 정아가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를 모국어처럼 할 수 있게 된 것도 그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조부모를 자주 만나고, 방학 때마다 두 달씩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친근해진 이탈리아어를 대학에서 부전공으로 공부했다. 스페인어는 독학으로 마스터했다. 물론 남편이 큰 도움을 줬다.

역설적으로 정작 이탈리아인 혈통을 타고난 카밀라는 이탈리아어를 잘 못한다. 카밀라는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부전공으로 삼았는데, 내가 아버지의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도 잘했으면 하는 마음에 “언니도 하는 이탈리아어를 정작 너는 못해서야 되겠냐”고 채근한 적이 있었다. 카밀라는 “나는 언니와 달라요”라며 볼멘 소리를 했다. 언니와 비교되는 것에 기분이 상한 듯해 두 번 다시 말하지 않았는데 요즘 카밀라도 은근히 후회하는 눈치다.

정아와 카밀라는 여러 언어를 습득하기에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의 모국어가 다르고, 그들이 나서 자란 곳의 말이 다르니 영어·한국어·이탈리아어 등 3개 언어를 접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우리 말을 사용하도록 가르쳤다.

“한국 말은 엄마의 언어야! 엄마 나라의 말을 너희가 못하면 어떻게 해?” 남편 출근 뒤 집에서는 우리 말로 대화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특히 정아에게 “100% 한국인인 네가 한국 말을 못하면 그건 엄마 망신이고, 네 망신이다”라며 엄격하게 지도했다. 점점 나이가 들고, 우리 말을 쓰는 것이 힘들어지자 정아도 카밀라도 영어를 먼저 쓰려고 했다. 나는 못 들은 척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말로 하기 전에는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엄마 망신인지는 몰라도 내 망신은 아니에요!” 제법 머리가 굵어진 정아는 굳이 한국어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며 이렇게 항의하기도 했다.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결과 정아는 물론 카밀라도 아직까지 우리 말을 잊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정아보다 긴 카밀라는 단어를 많이 알고 있는 반면 언어감각이 뛰어난 정아는 발음이 부정확하고 어휘력이 달릴지언정 꽤 수준 높은 우리 말을 구사한다.

그리고 요즘은 자꾸 잊어버린다며 나와 전화할 때는 꼭 우리 말로 하자고 한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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