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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프라임 엎친 데 오일쇼크 덮쳐 … 침체 먹구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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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 34면

“섣부른 안도감에 취해 있었다.”

‘삼각 파도’ 맞은 美 경제

지난 주말 월스트리트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 장탄식이다. 지난주 초반 국제 유가가 일시 하락하고 미 유통업체의 매출이 늘어난 것으로 발표되자 미국과 유럽의 증시에는 안도감이 퍼졌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미 경제가 침체로까지는 빠져들지 않을 것이란 기대였다. 급등하던 유가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금리인하 중단 시사에 힘입어 꼬리를 내리는 듯했다.

“미 주택시장의 침체가 이어지고 유가 상승의 기본 조건들이 여전히 건재한데도 시장은 외면했다. 아니 외면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미국 은행 와초비아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알 골드먼은 꼬집었다. 아니나 다를까. 6일 국제 유가가 하루 만에 10.76달러 치솟고, 미 5월 실업률이 전달 5.0%에서 5.5%로 오르자 시장은 혼비백산했다. 고유가·고용악화·신용경색 등 삼각파도를 맞고 주요국 증시가 급락했다.

시장은 ‘유가급등→소비위축→경기침체’로 이어지는 순환구조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오일쇼크 시대의 메커니즘이다. 전문가들은 국제유가 급등에 따른 인플레가 임금상승 등에 따른 물가 급등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한다. 임금이 오르면 일시적이나마 소비가 늘어 경제가 활력을 띠는 경향을 보이다가 일정한 시차를 두고 인플레 부작용이 나타난다. 하지만 유가 급등은 그런 허니문도 없이 곧바로 소비를 위축시켜 경제를 침체의 늪으로 밀어 넣는 경향이 있다. 대니얼 루비니(경제학) 미 뉴욕대학 교수는 “고유가 인플레는 경제가 결국 극심한 침체를 겪어야 해소될 것”이라며 “달러 강세의 유도를 위한 금리인상만이 유일한 처방으로 보이지만 지금 FRB는 그럴 힘이 없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1980년의 추억

국제경제 전문가들은 요즘 서고 한편에 꽂혀 있던 오일쇼크 관련 책들을 다시 읽고 있다. 오일쇼크 시대와 지금의 경제상황을 비교해 살펴보며 위기 상황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기 위해서다. 특히 1980년 2차 오일쇼크를 주목하고 있다.

미 경제는 79년 이란 이슬람혁명 여파로 발생한 2차 오일쇼크 때문에 80년 1월 침체에 빠졌다. 미 정부는 서둘러 기업에는 세금을 깎아주고 개인에게는 세금을 되돌려줬다. FRB는 과감하게 돈을 풀었다. 그 결과 경기침체는 단 6개월 만에 끝났다.

하지만 최대 석유 소비국인 미국의 경기침체로 잠시 주춤하던 국제유가는 80년 하반기 들어 다시 급등하기 시작했다. 특히 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면서 유가는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고유가의 충격에 따른 인플레 압력은 회복하던 미 경제에 찬물을 끼얹었다. 물가가 뛰면서 소비가 위축되고 기업 실적이 나빠졌다. 마침내 81년 6월 미 경제는 다시 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1차보다 두 배 이상 긴 16개월 동안 침체가 이어졌다.

지금 상황은 어떤가. 국제 유가는 배럴당 150달러를 불과 10여 달러 앞두고 있다. 급등한 기름값은 경제 메커니즘을 타고 빠르게 다른 물가를 자극하고 있다. 현재 기름값 수준이 유지된다면 조만간 물가 오름세가 전 부문으로 확산될 전망이다. 이는 소비위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인플레가 실물경제로 파급되기까지는 대체로 1분기 정도의 시차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인플레는 기업들의 실적에도 어두운 전망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지난주 포드와 다우케미컬이 고유가를 이유로 2분기 실적이 나빠질 것이라고 밝혔다. 항공사들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예고하고 있다. 금융정보업체인 톰슨 로이터는 지난달 말 월스트리트 상장회사의 2분기 평균 실적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3%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한 달 전(6% 감소)보다 낮춰 잡은 것이다.

여전한 서브프라임 그림자

서브프라임 사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위기의 뇌관인 주택시장 침체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3월 집값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4% 하락했다. 2006년 6월 최고치에 비해선 16.6% 이상 떨어졌다. 3월 집값은 일반 미국인이 버블 심리에 취해 본격적으로 돈을 빌려 집을 사기 시작한 2004년 10월과 거의 비슷하다. 미 자산운용사인 노던 트러스트의 폴 캐스리얼은 “2004년 이후 집값 상승분을 담보로 돈을 빌려 생활비로 쓴 수많은 미국인이 집값 급락으로 궁지에 몰려 있다”고 말했다.

그 결과 가압류가 급증하고 있다. 미국 모기지은행연합회(MBA)는 주택 가압류 절차가 진행 중인 주택 비율이 2.47%에 이른다고 5일 발표했다. 지난해 1분기(1.28%)보다 두 배나 높다. 또 79년 이후 29년 만에 최고치다.

모기지은행 등은 압류한 집 처리에 속을 태우고 있다. 4월 말 현재 66만 채가 채권 금융회사로 넘어갔다. 올 1월까지만 해도 49만 채 정도였다. 금융회사들은 이를 시장에 다시 내놓고 있다. 집값 하락을 부채질하고 있는 셈이다.

월스트리트 전문가들은 “서브프라임 사태의 원인이 사라진 게 아니라 사람들이 여기에 무뎌졌을 뿐”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지난주부터는 신용경색 우려가 스멀스멀 다시 피어 오르고 있다.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푸어스(S&P)는 세계 1, 2위인 채권보험회사인 MBIA와 암박의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강등했다. 이들 회사의 보증을 받고 AAA등급을 받은 각종 채권 값의 하락(실세 금리 상승)이 불가피하다. 신용경색 상흔이 여전한 금융시장에 금리 상승은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3월 베어스턴스를 침몰시켰던 ‘유동성 위기 루머’가 미 4대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를 옥죄고 있다. 리먼과 미 중앙은행 쪽은 유동성 위기를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루머 자체가 돈을 증발시켜 금융회사를 무너뜨리는 게 베어스턴스 사태였다는 점에 비춰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6월 셋째 주부터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들이 올 2분기 실적 전망을 내놓게 된다. 추가 부실이 드러나거나 예상 밖으로 나쁜 실적이 나오면 글로벌 시장은 또 한 차례 패닉에 빠질 수도 있다. 영국 더 타임스의 경제 칼럼니스트인 리엄 핼리건은 “서브프라임 사태는 역사적으로 아주 특별한 사건”이라며 “이런 사건이 실물경제에 이 정도 충격을 주고 끝난다는 것은 난센스”라고 지적했다.
 
딜레마의 포로

미 경제분석기관 이코노미닷컴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마크 잔디는 “최근 미국인의 인플레 기대심리가 높아지고 있다”며 “벤 버냉키 FRB 의장이 지난주 하버드대에서 인플레 위협을 강조한 것도 인플레 기대심리를 꺾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말했다. 당장 금리를 올릴 형편이 안 되니 일단 구두개입으로 인플레 압력을 낮춰 볼 심산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는 사정은 버냉키의 편이 아니다. 그의 발언으로 달러가 오름세를 보이고 유가가 떨어진 지 하루 만인 6일에는 다시 폭등해 버렸다. 유럽중앙은행(ECB)과 영국중앙은행(BOE)이 다음달 금리인상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ECB와 BOE가 실제로 다음달 금리를 올리면 버냉키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유로화에 대한 달러가치가 떨어지면서 유가가 더 오를 게 뻔하지만 금리를 올려 그 충격을 차단하기에는 미 경제의 체력이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FRB 전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로버트 헤츨은 “중앙은행가는 딜레마의 포로”라고 말했다. 상반된 리스크의 틈새에 갇혀 있는 존재라는 의미다. 요즘 버냉키가 그렇다. 그는 가시지 않은 금융위기·경기침체와 인플레 위험 사이에서 절묘한 정책 조합을 찾아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하지만 그는 앨런 그린스펀 같은 카리스마를 아직 갖추지 못했다. 이 학자 출신 중앙은행가의 시름은 깊어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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