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고-신경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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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작가 신경숙씨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고 자청해중앙일보에 소감문을 보내왔다.신씨는 『젊은 시절을 공단에서 보낸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작가로서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고 이유를 밝혔다.신씨는 최근 자신이 어린 시절 공단 근로자로 일할때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밝힌 자전적 소설 『외딴 방』을 통해 마음의 빚을 청산하려는 모습을 보여줬다.
[편집자註] 20분만에 영화가 끝나버린 것 같았다.상영시간을알아봤더니 106분이라고 했다.106분을 20분으로 느끼다니.
나는 영화『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연애를 한 모양이다.어느시대에나 불멸의 인간이 있다.불멸은 어느정도 박제화를 전제로 한다.박광수는 70년대 불멸의 노동자 전태일을 오늘날 젊은이들의가슴속에 다시 불러들였다.자기 계층을 사랑하고 갈등하는 인간.
자신이 속한 계층의 조금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불앞에내놓을수 있었던 전태일의 인간애.영화 『아름 다운 청년 전태일』은 무수한 시간의 단절을 뚫고와 다시한번 현재형의 광채가 되었다.젊은 친구들이 영화관의 자리를 빈틈없이 차지하고 앉아 숨죽이며 화면에 재생되는 인간 전태일과 교감하고 있는 모습이 그증명이리라.
전태일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그는 노동자들의 청년예수였다.
그의 죽음을 나눠먹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기자신들을 사랑하기 시작했고, 인간적인 삶을 위해 세상과 싸우기 시작했다.나 또한전태일의 죽음을 받아먹고 용기를 가진 언니들 곁 에서 한때를 보냈다.그러나 나는 그때 너무 어렸고 오로지 학교에 가야한다는생각뿐으로 전태일의 후예들이 나눠주는 리본하나 제대로 가슴에 달지 못했다.영화를 보는동안 내내 여성노동자 신정순에게서 눈길을 뗄 수 없었던 것도, 그녀의 어 떤 몸짓에서 그만 눈시울을붉히고 말았던 것도 그때 고단한 싸움을 벌이던 그들의 우수가 내가슴에 흘러들어서였다.
나는 영화를 평하려고 이 글을 쓰는게 아니다.나의 속내는 이글이 단 몇사람이라도 이 영화를 관람하게 하는데 힘이 되었으면하는데 있다.나는 이 영화의 제작이 나의 일처럼 기쁘고 가슴설다.한때 노동자였던 나를 나는 사랑하지 못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계층을 사랑할 수는 더욱 없었다.어떤 연유가 있었든 이것 또한 배반이다.이 글은 그들을 나의 자랑스런 친구들이라고 부르는데 17년이나 걸린 사람의 슬픔같은 것이며 박광수에 의해 다시 살아난 그들이 세상과 아름답게 섞이길 바라는 마음의 발로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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