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에 빠진 뉴질랜드 여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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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서울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뉴질랜드 사진작가 피오나 아문젠(34·사진)은 청계천에 가기 위해 항상 새벽 첫차를 탔다. 올 4월 초부터 두 달 가까이 거의 매일, 오전 5시30분 창동역을 떠나 시청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1호선 객차. 항상 북적대는 청계천이 아닌 “공간으로서의 청계천이라는 독립적 존재”를 느끼기 위한 시도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청계천 사진엔 사람이 없다. 초록색 풀과 회색 아파트, 빨간 페인트가 칠해진 다리의 도드라진 대비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아문젠의 독특한 ‘청계천에 말 걸기’로 태어난 사진 작품은 12점. 그가 외국인 입주작가로 생활하고 있는 창동 스튜디오에서 전시하고 있다. 4일까지. 아문젠은 뉴질랜드 오클랜드 공대의 사진학과 교수로, 이번 작업을 위해 학교를 잠시 쉬고 서울에 왔다.

전시회장에서 만난 그에게 왜 사람을 굳이 배제했는지 물었다. 그는 “우리가 어떤 장소에 있으면 그 장소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그 장소의 원래 의미를 잊는다”며 “나는 청계천 본연의 문화적·정치적·역사적 의미를 찾고 싶었다”고 답했다. 조용하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였다.

일본 도쿄와 히로시마 및 고국의 공원과 같은 다양한 공공장소를 색다른 사진작업으로 풀어낸 그에게 ‘공간’이라는 주제는 각별하다. 오클랜드 대학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한 그가 카메라를 잡은 것도 그런 ‘공간의 문화학’을 렌즈로 담아내고 싶어서였다.

특히 “문화적으로 재구성된 자연”을 작품의 영원한 주제로 삼는다는 그는 머나먼 대한민국 수도의 청계천 복원 계획을 들었을 때 “바로 이거다!”라며 무릎을 쳤다고 했다. 뉴질랜드에 와 있는 한국인 친구들로부터 ‘인공적으로 복원되는 하천’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고, 한국의 국제교류재단과 뉴질랜드의 아시아 뉴질랜드재단 공동 주최로 이뤄지는 작가 교환 입주 프로그램에 지원, 4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정됐다.

“서울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청계천으로 향했다”는 그는 처음엔 사진을 찍지 않은 채 몇 시간이고 청계천을 걷기만 했다. 동시에 청계천의 역사와, 복원 공사의 거대한 예산 등에 대해 계속 공부했다. 그러다 청계천 너머의 회색 아파트와 공사 현장이 눈에 들어왔고, “자연의 푸르름을 거대한 예산을 들여 인공적으로 되살린 재미있는 아이러니”로 청계천을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회색 아파트와 인공자연의 사진의 요소들을 통해 유토피아를 지향하지만 비유토피아적인 삶을 살아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창동 스튜디오의 전시기획자 정재원씨는 “우리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청계천이지만 아문젠의 사진은 우리가 몰랐던, 심층적 의미의 새로운 청계천을 알려준다”고 평가했다.

7일 한국을 떠나는 아문젠은 10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도 같은 주제와 내용으로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글·사진=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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