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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때가 차 오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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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난달 26일 밤 편집국으로 중국에서 긴급 정보가 들어왔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의 진위를 요로에 확인하는 한편, 김정일의 사망에 따른 기사계획을 검토했다. 신문사에서는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주요 사건에 대비해 미리미리 자료를 준비해 놓는다. 김일성 사망 때도 그 덕분에 몇 시간만에 지면을 차질 없이 만들 수 있었다. 신문은 이렇게 만든다고 치자. 이런 때를 대비해 우리 정부는 무슨 대책을 준비하고 있을까. 또 국민들은 무슨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까. 분명히 오고 있는 ‘때’를 우리는 준비 없이 맞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들이 스쳤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 점쟁이나 예언가에게 이를 맡길 수도 없다. 그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꾸준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그 파악된 사실을 바탕으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시나리오들을 미리미리 그려보아야 한다. 좀 더 바람직하기는 그 시나리오에 우리의 비전을 투입함으로써 단순한 ‘가능성의 미래’에서 ‘바람직한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한다. 남북의 미래도 마찬가지다. 이런 준비가 있을 때 북한에 급변사태가 와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

이명박 정부는 역대 어느 정권보다 남북문제를 접근하는 데 좋은 여건을 가지고 출발했다. 좌파 정부에 품고 있던 국민들의 의심이 제거됨으로써 보다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펼 수도 있었다. 새 정부는 역대 우파정책과 10년간의 햇볕정책을 아우르는 보다 지평이 넓은 대북정책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 정부의 대응은 매우 옹졸했다. 북한과 대화를 하니, 안 하니로 수개월을 보내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우리가 두려움 때문에 대화를 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대화를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 정부가 “전쟁이 나면 어떡하느냐”며 무조건 대화하자고 한 것은 바로 두려움 때문에 대화를 하자는 것이었고, 반면 지금 정부는 대화를 할 경우 ‘좌파 정부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시선 때문에 대화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대화의 목적은 상대를 나의 뜻에 맞게 움직이기 위함이다. 상대편이 내 말을 듣고 그것이 자신에게도 이익이라고 인식할 때 협상은 성공할 수 있다. 따라서 대화 여부보다는 상대를 움직일 지렛대를 가지고 있느냐 여부가 더 중요하다. 우리의 경우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가 있다. 우리의 경제적 능력이다. 혹시 우리 경제력이 아직 부족하다면 오일달러를 들여와서라도 북한의 경제를 살릴 수도 있다. 지렛대는 만들기 나름이다. 따라서 우리의 대북정책 초점은 이 지렛대를 어떻게 만들고 활용하느냐에 집중되어야 한다. 지금같이 대화조차 끊긴 상황에서는 북한에 급변사태가 일어났을 때 우리에게 유용한 지렛대가 있다 해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키신저가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은 수천 년 동안 독립을 유지한 세계 유일한 국가이고, 동아시아에 경제적·지정학적 영향을 계속 끼친 국가”라며 중국의 힘에 대한 관심을 표시했다. 서울에서 중국 유학생 폭력시위 때 중국 정부의 반응이나, 이명박 대통령의 방중 때 한·미동맹에 대한 중국 정부의 폄하발언 등을 보면 중국인의 뇌리에는 자신들이 한반도의 종주국이라는 생각이 거의 DNA처럼 박혀 있는 것 같다. 이런 그들인데 북한에 유고가 생겼을 때 그들의 개입을 막을 수 있겠는가? 북한 정권이나 북한 주민들이 남쪽의 미운 형제보다는 중국이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북한 땅에 중국이 개입할 경우 한국의 통일은 어떻게 되는가?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한반도에서 미국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퇴임인사차 백악관으로 부시를 방문하였을 때 “코리안들은 중국을 포함해 주변국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남북한 모두가 이 지역 평화 보호자로서 미국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김정일이 통일 후에도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미국 쇠고기 수입문제에 온 나라가 함몰되어 있다. 한반도에 닥치고 있는 쓰나미를 보지 못하고 지엽적인 이슈에 매달린 듯하다. 지금 북한 내부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북한에 변고가 생겼을 때의 시나리오들은 무엇인가. 통일에 대한 우리의 비전은 있는가. 우리는 어느 나라와 협조해야 하는가. 때가 오고 있다는 신호가 계속 날아오고 있다. 눈과 귀를 열어야 한다.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창극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