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메릴린치가 매도 추천을 늘린 까닭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올 들어 5월 말까지 거래소 상장주식 10개 중 7개는 연초보다 주가가 떨어졌다. 그중 94%는 코스피지수보다도 하락률이 컸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50개가 넘는 증권사가 낸 종목 보고서를 눈 씻고 봐도 ‘매도’ 추천은 찾기 어렵다. 지난해 말 현재 등록된 증권사 애널리스트만 1115명이다. 억대 연봉을 받는 스타도 즐비하다. 한데, 어째서 아무거나 찍어도 7할대 타율은 보장될 매도 보고서는 없는 걸까?

올해만 그런 게 아니다. 지난해 45개 증권사가 낸 종목 보고서는 3만2850건이었다. 이 중 매도 추천은 2.3%뿐이었다. 그나마 외국계가 평균을 올려준 거다. 국내사의 매도 보고서 비중은 1.1%밖에 안 됐다. 외국계(6.8%)의 6분의 1 수준이었다. 심지어 연초 주가가 곤두박질할 때도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라며 ‘매수’를 연발했다. 이러니 증권사 보고서에 믿음이 갈 턱이 없다.

애널리스트도 할 말은 있다. 매도 추천 잘못 냈다가 ‘전화 폭탄’에 시달린 경험이 한두 번은 있다. ‘밤길 조심하라’는 협박 정도는 애교다. 회사의 압력도 만만치 않다. 증권사는 돈 굴리는 기관투자가로부터 주문을 받아야 먹고 산다. 이 마당에 덩치 큰 펀드나 연·기금 매니저가 애지중지하는 종목에 감히 매도 의견을 때려?

설사 외부 압력에 초연하더라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요즘 애널리스트 평가는 펀드매니저 인기투표가 좌지우지한다. 펀드매니저 사이에서 한 번 ‘골통’으로 찍히면 억대 연봉의 애널리스트 꿈은 일찌감치 접어야 한다.

그렇다고 외국 애널리스트가 특별히 사명감이나 직업의식이 투철한 건 아니다. 미국에서도 2003년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씨티그룹 애널리스트였던 잭 그루브먼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1990년대 후반 ‘정보기술(IT) 업계의 지존’으로 불렸다. 98년 그가 회사에 벌어준 수수료는 3억4300만 달러에 달했다.

미국 최대 통신회사인 AT&T조차 그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그루브먼은 99년 11월 ‘중립’이었던 AT&T 추천 의견을 갑자기 ‘매수’로 올렸다. 1년 뒤 다시 중립으로 낮추긴 했지만, 그의 보고서 한 장에 AT&T 주가는 날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추천 의견을 올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쌍둥이 딸을 뉴욕의 명문 보육원에 넣기 위한 짬짜미였던 거다. 이게 들통나는 바람에 그는 벌금 1500만 달러를 물고, 증권가에서 영원히 쫓겨났다.

궤짝 하나에 썩은 사과 한두 개 정도는 섞일 수 있는 게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궤짝이 통째로 썩었다. 엉터리 보고서를 낸 혐의로 2003년 월가의 10대 투자은행이 모조리 뉴욕주 검찰에 덜미가 잡혔다. 벌금과 부당이익 반환금을 합쳐 14억 달러를 토해내고서야 사건이 마무리됐다. 애널리스트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조치도 뒤따랐다. 미국 증권사가 보고서 낼 때마다 매수·매도 추천 비율을 공개하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최근 메릴린치는 한술 더 떠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매도 보고서 비중을 최하 20%로 높이는 내용이었다. 반면 매수 비중은 70% 이하로 제한했다. 보고서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메릴린치가 매도 의견 비중을 높인 데는 교묘한 장삿속이 숨어 있다. 헤지펀드 고객을 겨냥한 거다. 최근 헤지펀드는 고평가된 주식을 빌려 팔았다가 주가가 떨어진 뒤 되사 갚는 ‘공(空)매도’로 재미를 쏠쏠히 봤다. 이들이 매도 보고서의 열렬한 수요자가 된 거다. 그 덕에 증권사도 짭짤한 수수료를 챙겼다.

시장의 힘은 이래서 무섭다. 미국에서조차 검찰이 칼을 빼들고 나서야 겨우 바뀌기 시작한 게 애널리스트 보고서다. 하지만 새 수수료 수입원이 생기자 증권사가 앞다퉈 매도 비중을 높이고 있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규제부터 연구하는 우리나라 금융 당국이 꼭 새겨봐야 할 대목이다.

정경민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