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8대총선최고화제!-농부 국회의원 강기갑 박영옥부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여성중앙사천읍내에서 차로 한참을 달려야 도착하는 작은 산골 마을. 50가구가 채 안 되는 농가들 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 마을은 강기갑 의원 (56)의 고향이자 현재 자택이 있는 곳이다.

강 의원은 젖소 키우고 감나무 재배하며 부업 삼아 매실 가공으로 생계를 잇는 농부이자 3남 1녀의 아버지다. ‘사천농고’를 졸업하고‘사천 농민회’회장을 지냈으며 고향 마을에서 56년째 땅 일궈 먹고 사는 오리지널 농사꾼. 4년 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의원 으로 국회에 등원한 후 한미 FTA 비준에 반대하며 단식 농성을 벌이는 등 농민을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활동해 왔다. 그는 1톤 트럭을 타고 국회의사당에 들어서며“내 자가용이 저 놈밖에 없는데 어쩌겠어요”라며 허허 웃고, 때로는 두 눈 부릅뜨고 매섭게 호통도 쳐가며 제 목소리를 내는 개성파 국회의원이었다.

■ 평생 땅만 일군 사천 토박이 농사꾼
좌충우돌 여의도 입성기

개인적인 정치 성향이나 정당 선호도는 잠시 접어두고 객관적인 눈으로만 보면 그는 적어도‘일 열심히 하는’국회의원 중 한 명이었다. 농민을 위한 정책을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애쓰고 다양한 의정 활동을 한 공로를 인정받았고, 결국 재선에도 성공해 국회에 재입성했다. 그렇다면 반백년 동안 맨손으로 땅만 일구며 살던 남자에게 지난 4년은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농사꾼으로 처음 국회에 갔을 때 사실 기대도 많고 포부도 컸지만 나 혼자 발버둥친다고 세상이 많이 바뀌는 건 아니더라고요. 아무리 숟가락 갖다 놓고 밥상 차리면 뭐합니까. 다른 사람들이 밥 먹을 생각 없으면 좋은 밥상은 나올 수 없잖아요. 나 혼자서는 힘들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덥수룩한 수염에 도포 자락 휘날리며 여의도에 나타났던 농부 국회의원이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사무총장 출신 정치 거물과 맞붙어 재선에 성공했다. 앞으로 4년 더 여의도에 머물게 된 정치인의 농촌 생활과, 가장을 국회로 보내고 시골에 남겨진 가족들의 일상이 궁금해 경상남도 사천을 찾았다.

■ 결혼하려고 가출까지 한 14살 연하 아내,
쉰살에얻은늦둥이 막내도 공개합니다

사실 국회의원이 되고 싶어 스스로 나선 사람은 아니었다. 평생 흙에서 사는 게 천직이라 여겼고, 젊어서부터 농민 운동에 관심이 있었지만 현실 정치에 발을 들일 생각은 없었다. 비례대표 제안을 받았을 때도“선거한다고 밖으로 나돌며 과수원 안 돌보면 당장 이번 달 융자금 이자는 어떻게 갚나”걱정하는 소박한 농군이었다. 마을 청년들끼리 모여 가끔 술판 이라도 벌이면 늘 정치인들 욕하는 게 일상이 었는데, 스스로도 그런 사람이 될까봐 두렵기도 했다. 특히 아내 박영옥씨(42)의 반대는 결심을 망설이게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서울 토박이인데도 남편 하나 바라보고 시골 생활을 결심한 박씨에게는 남편의 정치 입문 선언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가족들이랑 떨어져 있어야 하잖아요. 우리 집에 애가 넷인데 처음 선거 시작할 때는 막내가 돌도 채 안 됐어요. 갓난쟁이 업고 남편 쫓아다니면서 선거 운동 하라는데 누가 좋아하겠어요. 게다가 젖소는 80마리나 데리고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그 우유는 누가 다 짜내라고…. 당연히 반대했죠. 사실 내심 떨어졌으면 하는 심보도 있었으니까요(웃음).”

하지만 결국 그의 진로는 바뀌었다. 젊어서부터 농민 운동 하던 동료들도“우리 마음을 잘 아는 국회의원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며 등을 떠밀었고 주위에서도 잔뜩 바람을 넣었다. 스스로의 표현에 의하면“삽질 당해서 국회앞으로 던져지는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당선됐다.

아내에게는 집을 오가며 농사일도 병행하겠다 약속하고 여의도에 올라왔지만 지난 4년 동안 차분히 흙 밟고 씨를 뿌려 본 시간은 없었다. 서울에 따로 집을 구할 돈이 없어 의원회관에서 숙식을 해결할 정도였으니 흔히 생각하는‘금배지’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동안 과수원은 조카의 도움을 얻어 운영했고 목장은 친척들이 일손을 거들어 겨우 유지했다. 심지어 칠순을 바라보는 장인어 른까지 틈틈이 내려와 젖소를 돌본다. 앞으로 4년동안 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내와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도 든다.

■ 농촌 총각과 도시 처녀의 만남
14세 연하 아내와의 결혼 성공 스토리

아내 박영옥씨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그녀는 번듯한 직장을 다니던 서울 토박이였는데‘농촌청년 돕기’운동을 하던 선배를 따라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사무실에 들렀다가 남편을 만났다. 처음에는 주말을 이용해 봉사활동을 했지만 나중에는 직장을 아예 그만두고 농촌 청년 돕기에 앞장섰고 결국 강 의원과 결혼해 시골로 내려왔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열네 살. 25살 꽃다운 처녀였던 박씨는 불혹 앞둔 농촌 총각과 결혼해 아이를 넷이나 낳아 기르며 시골 아낙의 삶을 자처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처음에는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이 양반이랑 결혼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죠. 믿음직한 성품이어서 인생 선배로서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어요. 남자라기보다는 의젓한 삼촌 같은 느낌이었죠. 푸근한 느낌도 들고, 말과 행동이 늘 일치해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두 사람은 전농에서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 운동을 함께 벌였다. 강 의원은 농민 운동에 한창 열을 쏟던 시기였고 박씨는 모임의 간사였다. 별다른 데이트도, 남다른 감정 교류도 없던 사이였다. 하지만 어느 날 박씨가 우연히 강 의원의 일기장을 봤는데“평생 처음으로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게 자신인 줄도 모르고‘그 여자는 누굴까’혼자 궁금해 했는데, 며칠 후“박 간사! 내가 니를 사랑하는 줄 모르겠더나?”라는 투박한 고백을 받았다. 갑작스런 일이었지만 그녀 역시 믿음직한 존경심과 사랑 사이에서 남모르게 갈등했었던 걸까. 이내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불혹 앞둔 농촌 총각과 25살 풋풋한 여인의 만남. 편견 어린 눈으로 보면 백이면 백 ‘여자가 손해’라며 수군대겠지만 강 의원은 오히려“내가인심썼다”며 넉살좋게 웃는다.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만 내가 워낙에 훌륭한 사람이니까 이 사람이 나한테 왔죠(웃음). 대도시의 삶이라는 게 얼마나 삭막합니까. 이 사람한테 물 맑고 공기 좋은 시골에서, 행복한 농사꾼으로 사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줬으니까 내가 인심 쓴거예요(웃음).”

서울 등지고 농촌 생활을 선택한 힘이 오직 사랑 하나 때문이었냐고 묻자 아내는“내가 원래 겁이 없고 무모하다”며 웃어 보였다. 가난한 농사꾼으로 살면서도 자기보다 더 힘든 사람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니 그에게 인생을 걸어도 되겠다 싶었고, 결심이 선 순간 다른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단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결혼하기까지는 넘기 힘든 커다란 벽이 하나 있었다. 띠동갑이 넘는 커플들의 공통분모, 바로 처가의 거센 반대였다.

예상치 못했던 바는 아니지만, 어른들의 반대는 생각보다 훨씬 심했다. 장모는 딸을 달라는 강 의원의 면전에서‘양심도 없는 촌 늙은이’ 라며 멱살을 잡았고, 처가의 친척들은‘처녀 꾀어내는 유부남 사기꾼일 것’이라 수군대더니 호적 등본까지 몰래 떼어가며 뒷조사를 벌였다. 장발에 덥수룩한 수염 늘어뜨린 채 도인같은 외모를 하고 다니는 불혹의 농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좋은 신랑감’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을 터다.

“직장 잘 다니는 딸을 마흔 넘은 시골 노총각이 가로챈다는데 어느 부모가 좋아하겠어요. 어른들 심정은 지금도 충분히 이해하죠. 그래도 어엿한 국회의원 사모님으로 만들어 놓을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람은 인생을 길게 봐야죠. 아주 길~게(웃음).”

■ 농부 꿈꾸는 아들에게
근심 없는 세상 물려주고 싶다

반대를 뚫고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강 의원이 아닌 아내 박영옥씨의 노력(?) 덕분이었다. 절대 안 된다는 부모에게 맞서‘죽어도 하겠다’며 버텼고, 부모 뜻 거역하려면 집 나가라는 엄명에 정말로 가출해 보름 동안 친구 집을 전전했다. 집까지 나왔는데도 허락을 받아내지 못하자‘그럼 나 혼자라도 하겠다’선언하고 스스로 날 잡아 결혼식을 준비했다. 부모의 입장도 강경해서‘넌 내 딸 아니다’며 의절할 뜻까지 내비쳤는데 결혼식 하루 전날 외할머니가 중재에 나서 겨우 화해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딸 결혼식 안 보면 평생 후회할 테니 같이 가보자”고 설득한 것. 우여곡절 끝에 가족 앞에서 결혼식을 치렀지만 지금 돌아보면 부모에게 큰 상처를 드린 것같아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그만큼 남편에 대한 마음이 절실했다.

“결혼 후에도 엄마가 한동안 신혼집에 안 오시더라고요. 어린 마음에 그때는 서운했는데 딸이 고생하는 모습 보면 마음 아플까봐 차마 못 오셨던 게죠. 할머니가 한 번 다녀가셨는데 엄마한테 우리 집 벽에 금 가고 구멍까지 뚫려 있다고 말했더니 펑펑 우시더래요. 지금 생각 하면 참 죄송하죠. 제가 봐도 저는 참 연구 대상인 것 같아요. 이런 남자, 뭐가 좋다고(웃 음).”

결혼 생활은 비록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2년 만에 아들 낳고 두 살 터울 동생을 봤지만 두 아이로는 성에 안 차 네 살 차이 셋째와 늦둥이 막내까지 봤다. 막내가 태어났을 때 강기갑 의원은 딱 쉰 살이었다. “농촌에는 사람 많은 게 재산”이라며 넉살 좋게 웃는 모습에서는 FTA 반대를 외치며 한 달 동안 단식하던‘투사’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의 얘기를 들어보니 국회의원으로서는 강성 이미지로 보여도 아이들한테는 더없이 자상한 아빠란다.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인 장남 주원군과 중학교 2학년인 차남 주호군은 대안학교를 다닌다.

입시 경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던 부모의 의견에 아이들도 동의해 현재 경남 산청의 학교 기숙사에서 자연과 벗삼아 산다. 초등학교 4학년인 딸 소화양은 공부를 하고 싶어해 일반 중학교에 진학할 예정이고, 올해 여섯 살인 막내 금필이는 텃밭에 채소 심으며 노는 걸 즐길만큼 농부 체질이란다. 둘째 주호군도 아빠 따라 농사짓겠다고 선언했는데, 강 의원은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아들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나야 즐거운 마음으로 응원하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생길이라는 걸 아니까 마음이 짠할 때도 있어요. 그래도 아비가 농사꾼들 살기 좋은 세상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또 여의도로 가니까 뭔가 힘이 되어 줄 수 있겠죠.”

50년 동안 피땀 흘려 일군 땅을 아들이 물려 받아 아무 걱정 없이 농사에 전념할 수 있게 하는 것. 아버지이자 농부 출신 국회의원으로서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책임감이다. 땅 일구는게 좋아 평생 농촌에 열정을 바친 남자와 그 남자에게 일생을 건 여자. 순박하지만 속은 강한 두 사람의 삶은 그야말로 인상적이다.

취재=이한 기자, 사진=조병각(studio lamp)

팟찌기사 더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