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초 반짝 권력 → 레임덕 → 대통령 탈당 …‘20년째 악순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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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에 만들어진 현행 헌법이 정치 현실과 맞지않기 때문에 개헌을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학계와 정치권에선 장기 독재를 막기 위해 도입한 ‘대통령 5년 단임제’의 폐해를 지적하는 여론이 높다. 5년 단임제는 다음 선거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소신껏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대통령이 아예 여론에 귀를 닫고 고집을 부리는 단점도 생길 수 있다. 불행히도 국민에겐 ‘소신’보단 ‘고집’의 추억이 많다.

◇승자 독식, 2위의 공간은 없다=우리 정치 구조는 대통령 1인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시스템이다. 예선(당내 경선)이든 본선(대통령 선거)이든 2등에겐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2002년 대선 때 2위인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던 1144만 명이나, 2007년 대선 때 2위 정동영 후보를 찍었던 617만 명의 의사는 국정 운영에 반영될 길이 없다.

견제없는 권력은 독주를 낳기 십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중 지지율이 20%대로 추락해도 “당장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역사의 평가에 맡기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혀 야당은 물론 당시 집권당이었던 열린우리당과도 심각한 마찰을 빚었다.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내각 지지율이 20%대였다면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해 민의를 반영한 새 내각을 구성했을 상황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취임 두 달여 만에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하자 부랴부랴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하고 나섰다.

대통령이 자기 임기에만 신경쓰다 보니 장기적 부작용에 대한 고려없이 반짝 효과를 내는 정책에 집착할 수도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신용카드 발급을 남발해 노무현 정부가 ‘카드 대란’을 뒷수습하느라 진땀 뺀 게 대표적이다.

한나라당 허태열 의원은 “ 요즘처럼 사회 구조가 복잡해지고 민주주의가 만개한 시대에 대통령 혼자 모든 현안의 신호등 역할을 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라고 강조했다.

◇되풀이되는 임기 말 레임덕=집권 초기 강력한 대통령 권력에 의지한 개혁 드라이브→임기 3년차부터 국정 운영 난맥→레임덕 심화→대통령 탈당. 한국 정치의 부끄러운 ‘법칙’이다. 대통령중심제에서 대통령은 집권당과 정치적으로 한 묶음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당적을 포기한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비정상적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는 87년 이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등 4명의 대통령이 모조리 임기 말에 각료들과 함께 여당을 탈당하는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당적 이탈 기간(160일→110일→295일→362일)도 갈수록 길어지는 추세다. 87년 이후 3년 가까이 ‘집권당 없는 통치(non-party rule)’가 이뤄진 셈이다. ‘대통령 탈당=여당 실종’이 대의민주주의란 헌법 정신에 위배되는 현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연세대 박명림 교수는 “현행 제도로는 대통령의 업적 창출이 어렵고, 임기 말 대통령 인기가 떨어지면 여당이 정치적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탈당을 요구하는 현상이 되풀이된다”고 분석했다.

◇선거 주기 불일치로 민의 왜곡=대통령 선거는 5년마다 실시되고, 국회의원 총선거는 4년마다 치러진다. 그러다 보니 선거 주기의 불일치가 민의를 왜곡시킨다는 주장도 설득력있게 제기된다. 국회의원 선거가 해당 행정부의 업적 평가와 무관하게 치러지기 때문에 입법과 행정의 견제와 균형이란 민주주의 원리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가령 지난 4월 총선은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두 달 만에 치러진 선거여서 현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였다기보다 대선의 연장선상이란 성격이 강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민심의 평가는 2012년 4월에야 국회 의석에 반영된다. 게다가 그해 12월에 뽑힐 18대 대통령은 임기 4년 동안은 자신이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의 성적표가 반영된 국회와 일을 함께해야 한다. 현행 제도라면 대통령·국회·유권자 모두에게 불만스러운 구도가 계속 악순환되는 것이다.

김정하·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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