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지금의 위기를 벗어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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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60년 격동의 봄,자유당 권력승계 1순위 이기붕(李起鵬)은 독재정치.권력형 부패를 지탄하는 국민의 함성 속에서 온가족자살로 최후를 선택했다.당시 80여달러의 1인당 국민소득으로 삶을 꾸리던 국민에게는 李씨 집에서 발견된 신기 한 가전제품 냉장고와 낯선 과일 바나나는 부패의 증거물로 흥분하기에 충분했다. 이듬해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朴正熙)장군에게 「부정축재」로 구속되었던 기업인들은 「국가재건에 이바지」할 것을 다짐,전경련(全經聯)을 결성했다.1만달러의 1인당 국민소득을 누리게 된 1995년 가을,달동네 가정에도 냉장고가 보 급되고 바나나는 한낱 시들한 보통과일로 여겨진다.그러나 전직대통령 노태우(盧泰愚)씨가 감춰온 1,800여억원의 금융자산은 국민을 크게 분노시키고 있다.盧씨는 1979년 겨울 전선에서 군부대를빼돌려 서울로 입성하던 「결행」과 달리 일의 뒷마무리가 무인(武人)답지 못하다.대기업총수들은 전경련에 모여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5,6공의 전환기에도 권력형비리 시비가 있었다.
요즘 정가 모습은 서로 허물을 물고 물리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꼴이다.그러나 정치권력과 돈의 유착관계가 알게 모르게 진행돼온 과거관행에서 순결무구한 정치인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제 한국이 최대의 정치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계가 해야할과제와 지켜야할 자세를 생각해보자.
첫째,3金의 솔직성이다.유감스럽게도 盧씨 자금과 전혀 무관한이는 3金중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게 일반의 중론이다.있을 수 있는 盧씨의 자포자기적 폭탄선언에 모두 전전긍긍하는 느낌이다.
「직접」 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 제공하는 피난처 는 하늘을 가리려는 한뼘 손바닥만큼 옹색하다.다른 두 金씨의 침묵이나 축소공개도 탱천하는 국민의 분기를 막을 수 없다.
둘째,사직당국의 공평.준엄한 법집행이다.일반에는 준엄하면서 권력층에는 움츠러든 것이 종전 검찰의 인상이었다.여야 구분없이,뇌물은 물론 정치자금도 가림없이 밝혀 정계비리의 큰 뿌리를 송두리째 절단한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셋째,국민의 절제(節制)의식이다.「한점 의혹없이」는 듣기 좋은 수사학적 표현이다.그러나 현실사회는 흑백양극이 아니라 회색농담(濃淡)의 긴 연속공간이다.언론은 솔깃한 유언비어 보도를 자제하고,국민은 수사결과 의혹의 큰 대목이 풀리면 수용하는 성숙된 시민모습을 보여야 한다.
넷째,국민의 주권의식이다.金정부 핵심은 야권의 비리를 들추려면 자기네 순결을 주장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시달리는 듯하다.
오물묻은 개가 겨묻은 개를 나무랄 수 없지만,과거 정치관행에 비춰 겨묻은 정도라면 오물묻은 측을 비난할 수 ■ 다고 보아줄만하다.허물의 상대적 경중을 가리는 최후판단은 국민이 할 일이다. 다섯째,희생양 안 만들기 원칙이다.과거 때로는 배경있는 큰 도둑은 봐주고 경범자들은 다수 구속하는 모양갖추기식으로 수사를 종결하기도 했다는 설에 고개가 끄덕여졌다.서슬퍼런 권위주의 시대에는 정치권 유력자들에게 때마다 성금을 내고 회사의 생존을 보장받는 것이 기업인의 기본과제였고,치열한 수신경쟁시대에는 예금유치가 금융인의 1차적 임무였다.이번 사건과 관련해 다수 기업인과 은행원이 희생양으로 바쳐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건.사고의 빈발로 암울한 1995년은 곧 마감된다.밝은 새해,대망의 21세기를 바라보며 국민이 희망과 용기를갖도록 나라분위기를 새롭게 바꿀 계기가 마련돼야 한다.
이것은 양식있는 국민들이 납득하는 수준에서 이번 사건이 매듭지어지는데서 시작될 수 있다.어물쩍한 매듭으로는 분수령적 변화가 불가능하다.
한 나라 정치수준은 결국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다.책임과 권리의 균형감을 잃은 국민에게는 타락정치가 제격이며,이들에게는 역사,특히 불행의 역사는 반복된다.
(서강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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