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씨 부정축재 사건-財界 自淨선언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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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재계가 철저히 몸을 낮추고 있다.
3일 경제계 중진회의에서 당초에는 정치자금 제공에 대한 사과,앞으로는 깨끗한 경영을 하겠다는 다짐외에 「비자금 파문의 조기 매듭 촉구」등 3부분으로 마련된 성명이 발표될 예정이었으나회의 결과 「촉구」부분은 빠졌다.
전경련 실무자들이 마련한 성명 초안에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기수습을 기대한다』는 식의 표현이 있었으나 참석한 재계 총수중 상당수가 『사과할 것이면 깨끗이 사과만하자』『사족(蛇足)은 달지 말자』는 이의를 제기 해 최종 발표문에선 제외됐다.
대신 사과부분은 더욱 강조해 당초에는 「반성」과 「사과」중 어느 단어를 쓸지 검토했었으나 회의후 수정된 발표문에는 「참담한 심정」「진심으로 사과」「매우 부끄럽게 생각」「깊이 자성(自省)」등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단어들이 다 동 원됐다.
그렇다고 「겉치레성」인 것 같지도 않다.
황정현(黃正顯)전경련부회장은 회의후 기자회견에서 『형식적인 사과가 절대 아니다』고 강조했다.
회의도중 심지어 『오늘은 아무 것도 발표하지 말고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충분한 검토를 거친뒤 성명을 내자』『국민들에게 「쇼」로 비춰지면 안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고 한다.
오전11시 시작된 이날 회의는 당초 예정했던 1시간을 훨씬 넘어선 3시간이나 진행됐고 자장면 한 그릇씩으로 점심을 때우면서 거의 모든 참석자들이 발언을 했다.
참석자수도 역대 재계회의중 가장 많은 23명.
그만큼 재계는 이 회의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재계가 몸을 낮춘 것은 우선 구차하게 변명하기보다 사과할 것은 함으로써 오히려 동정이라도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계산이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현 정부출범이후에는 깨끗하다』는 표현으로 비자금문제가 「과거의 일」임을 강조함으로써 간접적인 선처를 호소한 흔적도 보인다.
그러나 또다른 중요한 이유는 「미래」에 있다.
즉 차제에 「기업하기 좋은 풍토」를 만들어보자는 뜻도 담긴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참석자들 가운데는 『이번 사태는 어찌보면 민주주의가 살아있다는 증거』『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즉 정치권에 돈을 안 주는 것이 기업만 각오를 해서는 안되는일인만큼 차제에 쐐기를 박을 것은 박자는 의도로 보인다.
이와 관련,회의도중 『돈을 주고싶어 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볼멘소리도 상당히 나왔었다는 후문.
黃부회장은 회견에서 「음성적 자금제공 단절」선언에 대해 『정치자금법에 따르는등 법대로 하자는 뜻』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한편 기업인 소환조사 문제는 이날 회의에서 전혀 거론되지 않았으며 회견때 『기업 스스로 성금등 제공 내용을 밝힐 용의』를묻자 黃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고 밝혔다. 민감한 문제까지는 재계 총의를 구할 수 없었던듯 싶다.
따라서 기업마다 서로 다른 입장을 어떻게 조율하고,특히 일단은 진지해보이는 이날의 「사과와 다짐」이 앞으로 어떻게 지켜질것인지 과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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