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72. 비난과 오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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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무대 위 필자. 길옥윤씨와 헤어진 뒤 ‘이혼 가해자’라는 오해에 시달려야 했다.

미우나 고우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한때는 사랑을 했기에 결혼까지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도 낳았고, 7년을 부부로 살았다. 그런 사람들이 헤어지면서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원수처럼 여기며 등 돌린 것이 아니었기에 우리 심정은 담담했다.

그러나 이혼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오는데 문득 허탈감이 밀려왔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결혼은 내게도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결혼 뒤 새로운 계획도 세웠고, 미래에 대한 꿈도 꿨다. 더욱이 가수와 작곡가의 만남이라는 전제가 있었기에 더 많은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부부로 살면서 힘든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부단히 노력해왔는데, 결국 이렇게 끝나버렸다고 생각하니 허무하기도 하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착잡한 마음이었다.

옆에 선 길옥윤 선생을 보며 ‘이 사람도 나와 같은 심정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길 선생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손을 잡은 채 나란히 주차장까지 걸어갔다. 다음날 신문마다 나와 길 선생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커다랗게 실렸다.

7년의 결혼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그 이후’다. 이혼 뒤 나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비난의 화살을 혼자 다 받아야 했다. 35년 전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이혼을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이던 시절이 아니었다. 무슨 사연이 있든 이혼은 집안 망신이라고까지 여기던 시절이었고, 웬만하면 참고 사는 것이 미덕이었던 사회였다.

게다가 ‘솜사탕처럼 보드라운 사람’으로 비유되곤 했던 길 선생이었기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는 약자였고 피해자였다. 반면 강하고 대담한 이미지를 가진 나는 강자요, 가해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기자회견까지 하며 길 선생이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을 다해 나를 감싸주고 변명해주었던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이까지 낳은 남녀가 부부의 인연을 끝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고 또 얼마나 깊은 사연이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이혼으로 인해 정작 당사자들이 받았을 상처나 아픔 따위에 대해 사람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수와 작곡가이기는 하지만 결혼과 이혼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며 분명히 사생활이다.

어떻게 그 사생활의 일면 일면을 버선목 뒤집어 보이듯이 보여줄 수 있겠는가!

길 선생이 술을 마시면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또 술에 취해 어떻게 주사를 부렸는지 시시콜콜 치부를 드러내며 말했더라면 믿어주었을까? 결혼 생활 7년 동안 생활비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 세 차례나 사업에 실패해 그 빚을 갚느라 만기가 2개월 남은 적금까지 해약하고, 이혼 당시 나는 세검정 집 한 채와 자동차 한 대밖에 남은 것이 없는 빈털터리였다는 것을 자존심도 다 버리고 말했더라면, 그래도 나를 가해자라고 오해하고 미워했을까?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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