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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채식하며 산다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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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안충기·이도은·이영희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채식의 단계

 국제채식연맹(IVU: International Vegetarian Union)에서는 채식을 ‘육지에 있는 두 발과 네 발 달린 동물을 먹지 않는 것은 물론 바다·강에 사는 어류도 먹지 않는 것이고, 우유·달걀은 개인적 이유로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다’고 정의한다.

하지만 여건상 부분 채식을 하고 있을 때는 다음과 같이 나뉜다.

하루가 열흘 같았다

안충기 기자의 ‘풀만 먹고’ 1주일

미국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 앤절리나 졸리가 채식을 한단다. 애플사의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와 가수 마이클 잭슨도 마찬가지란다. 예수나 석가는 그랬다 치자. 올림픽 육상 9관왕인 칼 루이스까지도 같은 부류라는 말을 들으니 나라고 못할까 싶다. 평소처럼 생활하며 일주일을 채식으로 버텨보기로 했다. 도전 단계는 동물성 식품을 일절 입에 대지 않는 비건(vegan)이다.

Day1 (5월 14일) 칼 루이스도 한다는데

저녁 메뉴를 생각하는데 동료들이 ‘당연히’ 고기 먹으러 가잔다. ‘인간 모르모트’가 된 나를 시험하려는 ‘배려’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우렁쌈밥집에 갔다. 우렁이가 들어간 강된장, 돼지고기볶음, 어묵, 고추·말린새우 볶음, 드레싱을 올린 샐러드 등 깔린 반찬의 절반이 동물성이다. 나머지는 쌈과 무생채뿐이다. 가지무침에는 멸치가루가, 김치에는 젓갈이 들어갔다. 시작부터 한숨이 나온다. 물에 밥을 말아 소금을 찍어 먹지 않는 다음에야 ‘비건’은 이룰 수 없는 목표다. 작전상 후퇴다. 젓갈 넣은 김치는 먹기로 했다. 계란말이에 자꾸 눈이 간다.

Day2 (15일) 무심코 나간 숟가락

아침은 미역국, 고사리무침, 취나물무침, 열무 물김치와 잡곡밥이다. 조미료나 다시다가 들어가지 않은 고사리는 맛이 쓰다. 점심에 콩국수를 먹고 중앙일보에 펜화를 연재하는 김영택 화백을 만났다. 김 화백은 가끔 먹는 유제품 외에는 비린 것을 멀리한 지 10년이 넘었다. “단골식당을 두고 간장으로만 간을 맞춘 우동, 조개와 달걀을 넣지 않은 순두부, 달걀을 뺀 비빔밥 등을 주방에 부탁하지요. 회덮밥 먹을 땐 회를 따로 달래서 함께 간 상대를 주면 다들 좋아해요.” 중국음식점은 바쁘지 않은 시간에 가 야채만 쓴 간자장을 주문한다. 육류를 잊은 지 오래건만 김 화백은 아직도 고기 먹는 꿈을 꾼단다. 늦은 퇴근길, 회사 근처 식당에서 김치볶음밥을 시켰다. 먹음직스럽게 올려 나온 달걀 반숙에 무심코 숟가락이 갔다. 아차 했지만 입은 이미 반숙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습관은 의지보다 빠르고 유혹 앞에 이성은 초라하다.

Day3 (16일) 고기 먹는 시늉을 하다

된장찌개와 두부 양념구이로 아침을 먹었다. 점심에는 취재를 겸해 서울 인사동에 있는 채식전문식당 ‘오세계향’에 갔다. 이승섭 사장의 채식 동기가 이채롭다. “대학시절 자취방에서 잠이 들려는데 문밖에서 계속 사그락사그락 소리가 나는 거예요. 문을 열어보니 다음 날 아침 찌개에 넣으려고 비닐봉지에 담아둔 조개가 입을 열고 내는 소리였어요. 그때 느꼈던 생명의 경외를 지금도 잊을 수 없지요.” 가족 모두 채식을 한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닌다. 병원에서 정밀검사해 봤는데 아이의 건강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채식의 장점을 늘어놓는 이 사장, 그렇다고 채식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콩가스정식, 연잎밥정식, 캘리포니아롤, 영양단호박찜, 능이버섯모둠전골, 매실탕수채 등을 놓고 여섯 명이 다 먹지 못했다. 모두 6만9000원, 고깃집에 가면 어림없는 비용이다.

저녁은 친구들과의 술자리였다. 조금 늦게 합류하니 내 사정을 알 리 없는 식당 아주머니가 내 앞의 불판에 삼겹살을 뭉텅 올렸다. 난감했다. 구워서 옆자리로 부지런히 옮겨주었다. 상추에 쌈장만 얹어 열심히 먹는 척했다. 2차로 간 맥줏집에서는 마른안주 속의 땅콩만 먹었다. 밤늦어 술자리가 끝날 즈음에 “오늘 나는 모르모트였다”고 밝혔다. 그때까지 눈치를 챈 친구는 아홉 명 중 하나도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술자리 분위기를 깨지 않으면서 어울릴 수도 있겠으나 술맛은 영 아니었다. 마음 한구석에 선을 그어놓고 마시니 그렇다.

Day4, 5 (17, 18일) 주말농장 있어 든든한 이틀

주말에는 밥 사먹어도 되지 않으니 걱정이 없다. 토요일 아침에 일찍 주말농장에 가 열무·상추·쑥갓·청경채·양상추·적겨자채·아욱·근대 등을 거둬왔다. 이틀 동안 먹을 채소로는 충분하다. 저녁엔 쇼핑 가는 아내를 일부러 따라나섰다. 대형 할인점이건만 생각대로 채식자를 위한 코너는 없다. 채소·콩·해조·과일·염장식품류는 많았지만 콩고기와 같은 가공식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국내 몇몇 업체에서 채식자재를 만들고 있지만 할인점에 입점한 곳은 많지 않은가 보다. 일요일 점심 때 결혼식이 있어 식장에 가니 시간이 남았다. 같은 건물에 있는 대형 할인점의 식품매장을 살펴봤다. 어제 들른 할인점과 큰 차이가 없다. 매장은 넓은데 신선식품이건 가공식품이건 역시 채식자들을 위한 배려는 없다. 포장해 파는 순두부나 냉면에도 육류 성분은 빠짐없이 들어 있다. 야채주스로 점심을, 버섯과 두부를 요리해 저녁을 먹었다.

Day6 (19일) 돌아서면 배고프다

선배와 둘이 점심으로 생태를 시켰다.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여 나온 두툼한 생태 토막을 선배에게 덜어주었다. 아침을 늦게 먹어 배가 부르다는 핑계를 댔다. 국물을 뜨는 시늉을 하고 상추와 오이무침, 김치만 가지고 밥을 먹었다. 식당을 나오는데 헛헛하다. 저녁엔 약속을 정하지 않았다. 밤 술자리의 고역을 또 겪고 싶지 않아서였다. 집에 가니, 나 때문에 며칠 동안 식단이 부실했는지 아이가 고기를 먹자고 했다. 퓨전식당에서 아이는 메뉴판도 보지 않고 스테이크를 시켰다. 입으로는 메밀을 먹으면서 내 눈은 아이의 접시에 가 있었다. 몸의 관성은 집요하다. 사람이 본래 초식동물이었다는 말,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밤늦어 단것이 생각났다. 과일 있나 하고 냉장고 문을 여니 그마저 떨어졌다.

Day7 (20일) 그런데 편한 속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속이 편하다. 어제저녁 생각을 하면 정신없이 배고파야 할 텐데 말이다. 아침은 청국장이다. 여덟 명이 함께 간 점심 자리, 푹 삶은 돼지고기 보쌈이 주 메뉴다. 채식 정진 중이라 고기 안 먹는다고 미리 밝혔다. 그러건 말건 다들 맛있어 죽겠단다. 배추쌈과 국수를 먹을 수밖에 없던 나는 죽을 맛이었다. 저녁으로 야채죽을 택했다.



일주일을 지내 보니

나름대로 반은 채식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깟 일주일’ 했다. 착각이었다. 몸은 이미 육식에 길들여져 있었다. 나 같은 직장인의 채식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지 않는 다음에야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반 식당에서 고를 수 있는 메뉴는 쌈·면·죽이 전부였다. 쌈장에까지 고깃가루가 들어간다는 것은 일주일이 다 돼서야 알았다.

가장 곤란한 점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집에서야 내가 음식을 선택할 수 있지만 밖에서는 그럴 만한 자리가 많지 않다. 내가 ‘갑(甲)’일 경우에도 상대의 입장을 헤아릴 수밖에 없다. 사람이 많은 회식자리라면 요령껏 피할 수 있겠지만 네댓 명 안쪽의 자리에서는 그도 쉽지 않다. 아직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해주는 존중의 깊이나 배려의 넓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채식도 개인의 선택이나 취향에 지나지 않는 문제이지만 많은 사람이 이를 기준으로 그 사람 전체를 규정하기도 한다. 회식자리에서 “나 채식해요” 하면 분위기가 썰렁해지기 쉽다. “채식을 하려면 인간관계는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는 김영택 화백의 말에 수긍이 간다. 밥 먹고 술 마시며 정보를 얻고 교분을 쌓는 게 직장생활의 큰 부분이니 말이다.

채식을 하니 좋은 점도 있다. 안주가 부실하니 술맛이 없고 술을 적게 마시니 상대방의 이야기가 들린다. 소화가 빨리 되어 속도 편하다. 몸이 가뿐하고 정신이 맑다. 변이 황금색으로 바뀌었다. 일주일 동안 입에 댄 육류는 엉겁결에 먹은 달걀 반숙 하나, 반찬과 양념에 들어갔을 젓갈뿐이다. 대개 달걀을 넣는 빵과 동물성 기름이 들어가는 과자도 입에 대지 않았다. 커피는 크림을 뺐다. 몸무게는 그대로다. 준비 없이 덜컥 채식을 시작하고 버틴 지난 일주일은 길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나 특별한 신념이 있지 않다면 채식,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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