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미로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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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비록 5억대1에서 당장 1등은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1등할 것같은 영혼들은 연옥의 단련을 받게 되고 언제라도 1등할 자신이 있는 영혼들은 천국의 여유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겁니다.마라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무■ 많은 사람이같이 뛰어도 결국 실력있는 사람만이 1등하잖습니까.따라서 아무리 5억대1의 경쟁이라지만 정말 실력있는 영혼은 1등을 할 수있는 거지요.천국의 여유와 기쁨이란 아마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삶을 여 유있게 고를 수 있는 것일 겝니다.영혼의 세계에서 놀고 싶으면 놀고,이승으로 나가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가고,이승의 삶을 구경만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재미있게 구경하고…그래서 영혼의 세계에서 가장 큰 과제는 영혼의 힘을 키우는 것이겠 지요.영혼 또한 성숙하고 단련할 필요가있을 테니까요.그걸 위해 영혼들은 인간 세상을 여기저기 많이 기웃거립니다.땅위에서 벌어지는 딜레마,인간들의 삶의 행태 속에서 교훈을 발견해 영혼의 힘을 키우려고 노력하는 거지요.영혼의힘이란 다름아닌 시공을 초월하는 정신의 힘일 테니까요.』 민우는 여기까지 얘기하고는 물 한 모금을 마셨다.대화라는 것은 참재미있다.말을 하다 보면 평소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마치 생각한 것인양 튀어나온다.하다보니 떠올라서 그저 얘기한 것 뿐인데….아마 지금 지껄인 말들 중에 태반은 평 소 생각으로 간직하지 않았던 것일게다.민우가 신나 계속 말을 하려고 하는데 상운은 혼잣말로 무언가를 부지런히 되뇌고 있었다.그러다 그는 문득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그리고는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며민우에게 다시 얼굴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맑게 빛나는 것이 무슨 신나는 생각이라도 떠올린 개구쟁이 같았다.상운은 민우의 얘기를 들으면서 퍼뜩 어떤 영감이,생각이 스쳐갔다.그는 어쩌면과거의 메시아 망상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그러니 이런 허무맹랑한 것들을 신나게 지껄이고 있는 게 아닌가.그렇다면 과거 이놈에게 집중했을 때 떠오른 그 시적인 계획-「그놈은 채영을 잔인하게 죽이고 메시아 망상으로 비약한 후한적한 섬의 요양원에 격리된다」-은 옳았다.
이놈의 말을 듣다 보니 왜 그런 상징적인 계획이 떠올랐는지 차츰 알 것같다.시간이 흐르면서 이 놈과 부대끼면서 그 계획은이제 모호한 껍질을 벗고 빛나는 알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역시 난 천재다.아무도 알 수 없는 미래를 이렇 게 예측할 수있다니….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좀더 기운을 내서 이놈의 말에 집중하는 것이다.그래서 이놈의 망상이 어디까지 부풀어지나 내버려두었다가 빈틈이 생겼을 때 밀어버리기만 하면 된다.
망상은 어디까지나 망상이다.절대 현실에서 빈 틈을 안보일 수는 없다.이제 승부는 끝났다.창조의 고통은 처음만 힘들 뿐 나중에는 이삭줍기만 하면 된다.상운은 속으로는 뛸듯이 기뻤으나 겉으로는 진지하게 대화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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