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게 좋아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2호 09면

일러스트= 강일구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버라이어티 쇼의 세상은 남성 천하다. ‘무한도전’ ‘1박2일’과 비슷한 포맷이었던 ‘라인업’은 모두 남자들 여럿이 노는 모습을 리얼하게 중계해준다. ‘라디오 스타’나 ‘무릎팍 도사’도 죄다 남자 MC만으로 이뤄졌다. 상대적으로 이 분야에서 여자들의 위상은 초라하다. 여자들만 모은 ‘해피선데이’의 ‘여걸 파이브’는 시청률 빈곤이 이어지며 막을 내리고, 여자들의 ‘무한도전’ 버전인 ‘무한 걸스’는 지상파에 입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초기에는 여자들도 간간이 등장하곤 했던 ‘무한도전’이나 ‘1박2일’에서 여자들이 사라진 뒤 이들 쇼는 나름의 색깔을 확실히 잡았다. ‘무한도전’에서 출연자들이 숙소의 한방에서 뒹굴면서 자는 모습은 큰 재미를 안겨줬고, 아예 숙박 자체를 쇼의 컨셉트로 잡은 ‘1박2일’은 길바닥에서 텐트를 치고 붙어서 같이 잔다. 남자들끼리만이 아니면 나오기 힘든 리얼함이다.

남자들만을 모아 놓은 쇼는 당연히 남성성이 넘쳐난다. ‘무한도전’은 짓궂은 악동들의 놀이터를 보는 것 같고, 복불복 게임을 하는 ‘1박2일’은 남자들의 엠티 같고, ‘라디오 스타’는 남자들의 술자리 대화 같다. 그런데 호통을 쳐 대고, 먹기 힘든 걸 먹이고, 노골적인 비난과 비꼼을 들이대며 서로를 공격하는 남자들만의 이 독특한 분위기는 볼 때는 킥킥대며 웃게 만들면서도 불편해지는 구석이 있다.

그래서일까. 여자들의 찜질방 수다 분위기를 테마로 한 ‘해피투게더’는 상대적으로 시청자를 아주 편안하게 빠져들게 한다. 유재석과 박명수 둘 다 아줌마 가발을 쓰고 찜질방에 놀러온 아줌마 행세를 하는 이 쇼에서는 모두가 헐렁한 사우나복에 우스꽝스러운 머리 수건, ‘생얼’을 하고 나온다. 외모가 무장 해제되자 토크도 헐거워지며 구수한 이야기가 쏟아진다. 날을 세운 공격보다는 공감이 분위기를 주도한다. 남 이야기 할 거 다하고 흉볼 거 다 보면서도 그래도 어쨌든 감싸줘야 한다는 아줌마 수다의 분위기다.

굳이 편을 가르자면 ‘해피투게더’는 남성성 물씬한 버라이어티 쇼계에 맞서 여성성으로 승부를 보는 유일한 쇼라고 치켜세우고 싶다. 편안한 진행과 함께 가끔씩 양념 같은 오버 액션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유재석이 그 중심에 있고, 박미선과 신봉선은 ‘해피투게더’의 남다른 여성성을 이끌어 낸 핵심 인물이다.

‘시집 잘 못 간 아줌마’ 와 ‘안 예쁘지만 잘생긴 남자가 좋은 처녀’로 자신을 낮춘 이들은 게스트의 이야기에 적극적인 공감의 리액션으로 이야기의 꼬리를 이어간다. 그러니 토크쇼에서 MC가 질문하고 게스트는 대답한 뒤 잠깐 동안 만들어지는 썰렁함이 이 쇼에서는 생길 틈이 없다. 이 독특한 수다의 분위기에서는 호통의 대마왕 박명수나 지상렬도 양처럼 행동한다. 캐묻고 공격하지 않았는데 결혼과 동거·임신 등 고백이 쏟아진 것도 이 쇼만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명랑히어로’에서 마초 기운으로 가득했던 ‘라디오 스타’의 출연진이 ‘해피투게더’의 오리지널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 박미선과 만나자 훨씬 유연해진 모습으로 변했다. 김구라는 독설만을 퍼붓다가 박미선의 은근한 주도로 역공을 당하기까지 했다. 예쁜 얼굴로 쇼의 꽃이 되거나, 혹은 못생긴 얼굴로 구박을 마다 않거나 하는 식으로만 버라이어티 쇼에 자리했던 여자들이 편안한 여성성으로 발을 넓히고 있는 모습을 보는 일은 기껍고 흥미롭다.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 출신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