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의 생물학 카페] 엄마·아빠로 만드는 호르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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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 39면

TV에서 아픈 아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퀭한 눈빛의 아이와 그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먹먹한 표정이 화면에 나오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정말로 이상한 건 이런 일은 이전에는 없던 일이라는 것이다.

잔인한 슬래셔 무비나 피가 난무하는 수사드라마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즐길 정도의 강심장이던 내가 TV를 보며 눈물을 흘리다니.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변한 것은 지난해, 아이를 가지고 난 후였다. 아이와 관련된 일들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게 되었기에 나와는 상관없는 아이의 투병 이야기에 내 일처럼 가슴이 아파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여성은 아이를 낳는 순간 엄마로 변한다. 모성애(母性愛)라는 것을 사회적으로 학습된 결과물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생물학적인 본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한 연구에 따르면 아직 새끼를 낳지 않은 처녀 쥐에게 호르몬의 일종인 옥시토신을 주입하면 이들은 남의 새끼들을 보듬고 나오지도 않는 젖을 물리며 이들을 보살피는 모성행동을 보인다고 한다.

이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엄마의 몸 속에 옥시토신의 양이 늘어나면 엄마의 모성행동과 아기에 대한 애착 형성도가 비례해 늘어난다.

옥시토신은 ‘빨리 태어나다’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는데, 원래 자궁의 근육을 수축시켜 진통을 일으키고 젖 분비를 촉진하는 호르몬이다. 옥시토신은 진통을 유도하고 젖 분비를 자극하여 엄마의 몸이 신체적으로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갓 태어난 아기에게 모성애를 느끼고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출산과 육아 관련 호르몬인 셈이다.

여성의 뇌가 출산을 거치며 옥시토신 샤워를 통해 ‘엄마의 뇌’로 바뀐다면, 정도는 달라도 남성의 뇌 역시 ‘아빠의 뇌’가 될 준비를 한다. 아이에게 아빠를 찾아주는 이 고마운 호르몬의 이름은 바소프레신인데, 옥시토신과 거의 비슷한 아미노산 구조를 갖고 있다.

바소프레신은 원래 체내의 수분량을 조절하기 위해 소변의 배설량을 증가시키는 호르몬이다. 하지만 설치류 실험에서 또 다른 기능을 보여주었다. 새끼의 출산과 연관된 경우에는 바소프레신이 증가할수록 영역을 지키고 새끼를 보호하기 위한 공격성이 함께 세져 새끼와 보내는 시간이 더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들 결과를 살펴보면 모성뿐 아니라 부성도 유전자에 아로새겨진 본능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된다. 가끔 언론에 오르내리는 무늬만 부모인 이들의 행동을 접하면 인간보다 오히려 본능에 의해 지배받는 동물이 더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학습할 수 있는 뇌를 가졌다는 것이 귀중한 아이들을 돌보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우스꽝스럽게 큰 뇌가 과연 무슨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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