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책가방 없는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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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0년쯤전 한 어린이잡지가 어린이날을 맞아 「내가 만약 어린이나라 대통령이라면」이라는 제목의 글을 모집한 일이 있었다.온갖 기상천외의 내용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최대 공약수적인 것이 「무거운 책가방과 숙제와 시험을 없애겠다」는 「공 약」이었다.
옛날에 비하면 책가방도 많이 가벼워지고 숙제나 시험에 대한 부담도 많이 줄어든 셈이지만 그 세가지는 아직도 국민학교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동심을 멍들게 하는 요소로 남아있다.
「책가방 무겁다고 공부 잘하나」라는 냉소적 유행어가 등장하기시작한 것은 국민학교 어린이들이 교과서.참고서.도시락.학습재료등이 들어있는 서너개의 가방에 질질 끌려 힘겹게 등.하교했던 시절이었다.무거운 책가방때문에 좌우 한 쪽의 어 깨가 불균형하게 낮은 어린이가 많다는 조사결과가 발표된 적도 있었고,어린이들의 책가방을 가볍게 해줘야 한다는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했다.
과연 그처럼 많은 「짐」들이 모두 하루 학습에 필요한가도 의문일 뿐더러 준비물의 많고 적음이 잘 가르치고 잘 배우는 것과어떤 관계가 있는가도 아리송하다.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국민학교어린이들이 무거운 책가방에 시달리는 것은 우리 초등교육 현실의한 단면을 그대로 드러낸다.학과교육에만 치중할뿐 스승. 제자간의 마음과 마음을 통한 교감(交感)으로써 슬기와 지혜를 체득하는데는 등한히 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책없는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주일에 하루를 「책가방없는 날」로 정해 글짓기.스포츠.자연관찰.현장학습등 책 없이도수업이 가능한 자유학습을 하도록 권장하기 시작한게 72년이었다.하지만 일부 농촌에서는 농사일 돕기로 변질되는 가 하면 도시학교들의 경우 「노는 날」로 전락하는등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명분에만 얽매여 본래 취지를 살리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해 나가지 못한 탓이다.
현재 일부 국민학교에서만 실시되고 있는 주 1회 「책가방 없는 날」을 중.고등학교까지 확대하겠다는 교육부의 방침도 그럴듯하긴 하지만 인성(人性)교육 실천에 얼마나 이바지하게 될는지는두고 볼 일이다.
중학교때부터 대학입시를 걱정해야 하는 우리 교육풍토에서 중.
고생의 「책가방 없는 날」은 자칫하면 또 다른 형태의 공부전쟁을 유발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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