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공주·메뚜기 개그 … 은행 광고의 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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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광고가 이렇게 경박해도 되는 건가.”

기업은행 문화홍보부 이응준 차장은 올 들어 이런 질책을 수없이 들어야 했다. 은행 광고의 문법을 무시한 파격적인 광고가 문제였다. 은행 광고는 모든 계층에 호감을 주고, 이른바 ‘안티’가 없는 든든한 이미지의 모델이어야 한다는 게 불문율이다. 그런데 최근 방영된 기업은행의 광고엔 여성 방송인 박경림씨가 주연이다. 심지어 은행에서는 절대 금기인 ‘가짜’도 등장한다. 유명 토크쇼 사회자인 오프라 윈프리의 대역 배우를 등장시킨 것. 애니매이션 기법을 활용해 은행을 놀이동산에 비유한 광고도 병행했다.

이 차장은 “기업 전문의 국책은행이라는 무거운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충격요법이 필요했다”며 “의도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노이즈 마케팅’을 시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카드의 초기 마케팅에 참여했던 그는 지난해 기업은행에 스카우트됐다.

은행들이 보수적 이미지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고 있다. 변화는 광고에서부터 감지된다. 이른바 ‘어깨 힘을 뺀’ 광고가 부쩍 늘었다. 신용카드·증권사의 마케팅 기법을 빌려 쓰는 데도 스스럼이 없다. 새 정부의 국책은행 민영화 방침에다 자본통합법 시행이라는 시장 환경의 변화가 결정적이다. 적어도 광고만 보면 은행은 이미 ‘갑(甲)’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있는 중이다.

◇마케팅에 눈 뜨다=기업은행이 파격 광고를 내보낸 데는 절실한 이유가 있다. 지난해 말 조사에서 이 은행이 개인 예금을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소비자가 10명 중 4명에 달했다. 민영화를 앞둔 기업은행의 최대 고민은 자금 조달 창구를 개인 고객층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문제는 수십 년간 쌓인 고정 이미지였다. 이를 깨려는 모험은 일단 성공적이라는 평가다. 설문조사에서 최근 내보낸 광고가 일반 은행의 이미지를 심는 데 도움이 됐느냐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한 경우가 반대의 경우보다 네 배가량 많았다.

파격은 요즘 은행 광고의 큰 흐름이다. 신한금융은 최근 TV 사극 형식의 코믹한 설정의 광고 제작을 검토했다. 신한금융 양광우 부장은 “예전 같으면 아예 시안조차 나오지 못했을 형식이지만 이번엔 경영층에서 막판까지 선택에 고심했다”고 말했다.

◇욕망을 드러내다=은행 광고의 변신에는 자통법으로 상징되는 ‘금융의 퓨전’이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업종별 칸막이가 사라지면서 은행이 폐쇄적 환경에서 쉽게 돈 벌던 시절은 지나갔다. 1분기 실적만 봐도 그렇다. 전체 은행의 자산은 전 분기에 비해 32조원가량 늘었지만 이를 통해 벌어들인 이자 수익은 1500억원이나 줄었다. 박한 이자를 주던 예금통장의 돈이 빠져나가면서 벌어진 일이다. 대신 펀드·보험 판매 수수료, 신용카드 수입 등은 늘어나는 추세다.

변화에 대한 은행의 욕망은 고스란히 광고에 담기고 있다. 국민은행이 정명훈씨·김연아양을, 신한금융이 배용준·최경주씨를 광고 모델로 기용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국민은행 김진영 차장은 “앞으로 먹고살 거리는 해외에 있다는 게 은행의 공감대”라며 “동양인이라는 한계를 딛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인물을 끌어와 글로벌화를 이끄는 ‘리딩뱅크’라는 이미지를 심으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크고 튼튼하다’는 이미지에서 벗어난 차별화 바람도 불고 있다. 하나금융은 현대 미술가 앤디 워홀 등을 등장시켜 문화코드를 차별화 포인트로 삼고 있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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